그는 “이웃 일본만 해도 2, 3년을 주기로 눈에 띌만한 책을 내놓는 신진 학자들이 등장한다”며 “하지만 한국에서는 최근 10여 년간 선배 학자들의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후배 학자 연구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웃 일본만 해도 2, 3년을 주기로 눈에 띌만한 책을 내놓는 신진 학자들이 등장한다”며 “하지만 한국에서는 최근 10여 년간 선배 학자들의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후배 학자 연구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교향곡 제7번은 제2차 세계대전인 1941년 레닌그라드전투 당시 작곡되었다.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나치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져있었다. 결국 레닌그라드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포위에서 풀려나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이곳에서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한다. 그해 12월 완성된 이 곡은 레닌그라드 시에 헌정되었고 발표되자마자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방국가에서 연주되었다. 전쟁 중 쓰여진 교향곡 제7번, 8번, 9번을 일명 `전쟁 교향곡’이라 부른다. 그중 교향곡 제7번은 표제음악으로 독일의 공격과 이에 저항하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투쟁과 고통, 그리고 최후 승리의 함성을 파노라마처럼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고향인 레닌그라드에 살고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를 하려고 했지만, 심한 근시와 쇠약한 체력으로 군복무를 거부당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국가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서둘러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국은 그해 10월 쇼스타코비치 일가를 레닌그라드에서 쿠이비셰프로 피난시켰고, 그곳에서 이 곡은 1941년 12월 완성되어 이듬해 3월 초연되었다. 한편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된 이 곡의 악보는 미국으로 보내져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1942년 7월 초연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조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7번을 통해 나치에 대항해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했고, 전쟁의 포연 속에서 절반 밖에 남지 않은 볼쇼이관현악단원들을 불러 모아 이 곡을 연주했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나는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갔다. 그 곡은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전쟁판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전쟁을 겪는 조국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싶었으며 그걸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전쟁이 터진 첫날부터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아주 집중해서 작업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대해, 그리고 적에게 승리했음에도 힘도 생명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우리 동시대인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