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실재론에 대해 막연하다.
“‘존재 그 자체’의 탐구라고 하는 존재론의 출발 지평은 근대로 오면서 변화하게 된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이행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도 ‘존재’를 ‘인간을 통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과 무관한 존재라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관한 논의조차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특수한 양식이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파악된다. 근대 이후의 존재 개념이 고/중세의 존재개념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인식’이므로 ‘존재의 경험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존재론은 인식론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칸트의 철학이다. 칸트의 구성설적 인식이론을 보면, 대상의 데이터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을 통해 수용될 때 감각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 경험을 오성의 범주에 의거하여 구성할 때 비로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직관의 형식과 오성의 범주]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요소들이다. 즉, 경험에 앞서서(transzendental) 인식 주관에 주어진 일종의 규정 작용의 법칙들이다. 따라서 주관에 속하는 이 선천적 법칙들이 객관의 경험과 합치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로써 존재론은 선험철학 속으로 해소되어 인식론으로 변질됐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학적 성격이 이렇게 변화됨에 따라 칸트에 있어서 형이상학도 새로이 규정된다. 그것은 인식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삼는 탐구로 규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