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12th, 2007

May 12, 2007: 1:00 pm: bluemosesErudition

‘무’에서는 ‘무’가 도출될 뿐이다(Nothing comes from nothing). 시원이 없다면 진화도 없다. 즉, 흙이라도 있어야 인간이 있고, 도토리가 자라나야 떡갈나무가 된다. 만약 위의 전제에 수긍한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은 더이상 대립쌍이 아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각각 시원의 전과 후를 사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논의의 차원이 상이하다. 창조론은 신을 개입시켜 토대를 마련하고, 진화론은 그 토대 위에서 운동을 전개한다. ‘다이너마이트’ 제작의지와 폭파원리를 혼동해선 안 된다.’

* “불교는 붓다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법을 믿는다. … 붓다마저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오로지 불법에만 의지해서 [몰주체로] 자신을 수련해 나가야 한다는 것 등은 신도들을 편협한 독단에 빠지지 않게 하는 현명한 요인이”나 신을 사상함으로써 불교는 종교에서도 탈피한다.

: 12:00 pm: bluemosesErudition

1. 결재자의 입장에서 기안한다(Liability for the result).

2. 규정에 근거한 유기적 논리로 주장을 관철한다(Logic on rules).

3. 구상과 실행의 간극을 좁힌다(Holistic poiesis).

4. 담당책임자를 지정한다(Against the tragedy of the commons).

5. 간결명료하게 표현한다(1 page proposal).

 * 단, 상관이 무가내하일 경우 “예” 외에 대안은 없다(TINA except “Yes”).

: 1:04 am: bluemosesErudition

“[초국적 금융지배체제에서 비롯된] 탈민족국가적 흐름은 민족국가적 분절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분절을 심화시키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 1) 자국자본이 세계시장에서 국제경쟁력을 지니고 있거나 강화시킬 수 있는 국가들은 세계시장에서 자국자본의 국제경쟁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원을 총동원하는 ‘국민적 경쟁국가(Hirsch, 1995)’로 변모하고 있는 반면, 2) 자국자본 중심의 발전이 어려운 국가들은 자본의 국적에 상관없이 자국의 영토로 자본을 최대한 유치해 세계적 수준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에 대한 자국의 분배 몫을 늘리는데 주력하는 ‘탈국민적 자본유치국가(Holloway, 1994)’로 급속히 전락하고 있다(김세균, 2006).”

: 12:09 am: bluemosesErudition

“자본가와 노동자 양쪽 모두에게 자본주의의 고유한 사회적 생산관계들과 그 효과가 아니라 어떤 외부적 힘들이 이러한 통제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예를 들어 일자리 감소나 파산은 기계 고장, 소비자 선호의 변화, 국제적 경쟁, 모종의 원인에 의한 경제위기 같은 어떤 사건이나 비인격적 힘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최근에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가 현대 자본주의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 종교적인 용어로 이해돼 왔다(Fine & Saad-Filho, 2006).”

“[그에 따르면] 종교는 소외로부터 유래하는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 종교는 비록 사회적 병리현상을 고친다 해도 문제의 심각성을 혼동시키고 진정한 해결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딜레마를 초래할 뿐이다. (중략) “종교는 민중의 아편(the opium of the people)”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즉 노동의 착취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이 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종교가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달래주기만 하여 오히려 모순 자체의 심각성을 흐려 놓거나 진정한 투쟁에 의한 해결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중략) 종교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의해 병들어 가고 있는 사회에 아편처럼 일시적인 진통효과만 가져올 뿐이고 궁극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다(김종서,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