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 함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은 하나이자 똑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이를 뿐이다. …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인 한, 그의 운수(運數)는 자본에 달려 있다. 이것이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다.”

2.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조차 자본의 이해 관계와 임금 노동의 이해 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가능한 한 급속한 자본의 성장조차, 그것이 아무리 노동자의 물질적 생활을 개선한다 하더라도,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부르주아의 이해 관계, 자본가의 이해 관계 사이의 대립을 철폐하지는 못한다. 이윤과 임금은 그 이전이나 이후나 반비례 관계에 있다.”

3.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급속히 성장하며,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을 위한 고용 수단, 생활 수단은 더욱더 감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임금 노동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인 것이다.”

* ‘07년 5월 2일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성물산 46기 신입사원의 사직서”라는 글을 접했다. 이내 소름이 끼쳤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웃지 못할 희극(comedy)을 목도했다. 밖에서 선망했던 ‘정글의 왕국’이 부단한 재무장으로 경쟁자를 압도하지 못하는 형국에 이를 갈며 슬피 우는 모습은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내는 자본의 육화와 겹쳐진다. 결국 부단한 혁신이라는 숭고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심성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10년 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늘의 행복이라고 믿기에, 현재는 중요한 시간이 아니라 유일한 순간이라고 믿”는다는 ‘그’가 추구하는 행복(being well)은 과연 무엇일까? 

* 윗 글에 대한 답글들 - 대체적인 논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어린 투정’으로 모아진다 - 을 보며, 그들이 꿰고 있는 “세상 물정”이란 무엇일까 하고 다시금 자문한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나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윗글의 역설이 비로소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