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28th, 2007

July 28, 2007: 10:51 pm: bluemosesErudition

  “한인 아프간 피랍“은 국내의 여론과 괴리된 사태 규정이다. “일단 사람은 살리되, 고개 숙이고 입국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 피랍 사태는 “기독신도 석방 국고지원“에 대한 [찬반이라기 보다는] 소수의 ‘당연함’과 다수의 ‘못마땅함’으로 재규정돼야 한다. 왜냐하면 ‘한인 아프간 피랍’을 둘러싼 여론표명은 표면상 종교 다원주의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으로 비춰지나, 기실 납세의무에서 제외된 교회를 향한 사회적 거부감을 [납세의무를 다하는 ‘국민’인] 신도들에게까지 투사한 ‘불만의 토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슬림 노동자에게 돼지고기를 강요한 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무신경한 대중들이 종교 다원주의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국민을 신도로 매도하며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따라서 금번 아프간 피랍 사태는 A급 매치에서 종종 목격하는 열광적인 민족주의도 경제적 이해관계와 상충될시 허상으로 돌변하기에, 향후 선교활동시 내국민의 ‘빵’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비통하다.

: 7:43 pm: bluemosesErudition

“무신론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종교는 서로 적이라는 상식을 한 꺼풀 벗겨보면, 닮은 점이 의외로 많다. 공산주의 역사철학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마니교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라는 세속적 사탄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위대한 수령의 영도 아래 낙원을 향해가는 고난의 행군의 역사인 공산당 약사는 동족을 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에 정착한 모세의 이야기와 닮았다. 결국 공산당 약사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같은 플롯 위에 서 있다. … 내용을 조금 바꾸더라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21세기 남한사회에서 스스로 종교가 되고자 하는 근대 권력의 욕망은 얼마나 큰 것일까? 나라 사랑의 표현인 우리의 ‘국민의례’는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정치종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원문)”

* 임지현 씨가 ‘07년 7월 28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종교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다. 그의 글이 ‘비판’이 아닌 ‘비난’인 이유는 의도적 몰이해에 근간한 윤색된 이미지의 무분별한 혼합(cogito interruptus)을 통해 ‘공산주의’와 ‘종교’의 본질을 오도하기 때문이다. 가령 “위대한 수령의 영도 아래 낙원을 향해가는 고난의 행군의 역사인 공산당 약사는 동족을 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에 정착한 모세의 이야기와 닮았다”와 같은 언급은 한국전쟁을 야기한 특정 집단을 연상케 함으로써 공산주의와 종교 모두에 대한 민중의 오해와 혐오를 강화시킨다. 이는 양자의 핵심 요소를 사상하고, 동음이의어에 불과한 변질된 외양과 지엽적 국면을 부각시킨 다음, 논의대상을 악의에 찬 통념과 결부시켜 싸잡아 폐기하는 천박한 대중선동이다. 흡사 임지현의 논조는 1940년대 독일 총통의 연설을 재현한 듯하다. 이러한 그가 ‘조선일보’에 ’국민의례’를 거론하며 [굳이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를 예로 들어 공산주의와 종교를 조야하게 절충시킨] 정치종교의 폐해를 근심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건현장을 다시 찾는 범인의 그로테스크한 배설욕구일까?

 * 상술한 내용과 관련해선 강준만의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겠다. “임지현 당신의 ‘조선일보’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인물과 사상, 통권 22호).” 

: 5:45 pm: bluemosesErudition

“진정한 스타일은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구조가 없는 스타일은 데코레이션일 뿐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보이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구조는 무엇이겠는가. 벤야민의 “얘기꾼과 소설가”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또 어떤가. “심리적 분석이 배제된 정결하며 간결하게 짜여진 집중적 문체” 그리고, 공부는 바로 감춰진 이 구조를 보는 훈련이다(강유원, 070727).”

* 근 한 달간 지속됐던 심란한 고민에 대한 정연한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