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2nd, 2018

June 22, 2018: 10:43 am: bluemosesErudition

수단과 목적이 질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질문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는 널리 유행하는 질문이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진정한 질문은 언제나 “이 특정한 목적이 이 특정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타협은 허약함, 우유부단함, 고매한 목적에 대한 배신, 도덕적 원칙의 포기와 같은 어두움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단어이다… 이 단어는 보통 윤리적으로 불미스럽고 추잡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를 요구하고 그 뒤에 30% 선에서 타협을 하라. 당신은 30%를 번 것이다.

표적을 선별하고, 고정시키고, 개인화하고 극단적인 것으로 만들어라.

: 1:53 am: bluemosesErudition

“김수영은 좋은 시를 정의하며 ‘사상이 새로운 언어의 작용을 거쳐 자유를 행사한 경우’라거나 ‘침묵의 한걸음 앞의 시’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어. ‘죽음의 음악이 울린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도 했지. 반면 난해시처럼 꾸며 쓰는 시들 앞에서는 ‘언어의 대한 고통 이전에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라다’라며 혹평을 했어. 그뿐만 아니라 삶과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연스럽게 끌어올려내지 않은 참여시들도 배격했지. 김수영식 비평의 미덕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는 작품의 구체적 텍스트에서 시작한다는 데 있어. 『사상계』나 일간지에 월평을 많이 쓰곤 했는데 매달 육칠십편의 시를 읽으며 그야말로 작품과 정면대결을 벌였지. 자신이 세운 비평적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 작품을 동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사실 서라벌예대 1학년 때 김수영의 수업을 몇번 청강한 적이 있었어. 그때 4학년들이 듣는 ‘영미시비평’ 수업을 김수영이 하고 있었거든. 밤새 술을 마시고 온 것처럼 안색이 피곤해 보이고 늘 신경이 날카로웠어. 내가 쓴 시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돌아온 것은 야단 맞는 일이었지. 내게 영어 공부나 하라고 했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호랑이」(The Tyger)를 원어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 그런 세계적인 호흡의 시를 충분히 인식하는 일이 먼저고 시는 그후에 써도 좋다는 거야. 당시에는 그 말이 서운했는데 막상 지금은 그게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겠어. 이십년 넘게 창비시선과 함께 지내오면서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진영논리를 앞세우고 고수하지는 않았나 하는 거야. 감각이냐 현실이냐의 문제보다는 작품다운 작품이냐가 선행되었어야 하는 건데. 창비시선의 향후 과제 역시 노동이나 현실의 가치를 의식적으로 담아내는 일보다는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실다운 작품을 발굴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김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시인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눈은 반짝였다. 하지만 내가 미당에 관해 물었을 때는 시인은 다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시인의 한 포즈’만 목격했을 뿐 배운 것이 없다고 했다.

: 1:07 am: bluemosesEru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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