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은 명백하다. 일단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화자의 진술은 ‘집’보다 ‘가정’이 자연스러운 중년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오리를 보고 집에 있는 “내 자식들”을 떠올리는 장면은 화자와 그 동행이 사실은 자식까지 있는 부모이며, 심지어 ‘우리’ 자식이 아닌 ‘내’ 자식을 떠올리는 불륜 커플임을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물이다. 요컨대 무대를 꾸미는 것은 “관리인과 어린 화자의 대립구도”도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현실로서의 사회로부터 “최대한 멀리” 가 있는 소년(들)의” “독고다이식 화법”도 아니며, 오직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두 중년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멀리 갈” 것이라는 천진한 발화는 “그때도 어떻게든 돌아왔”다는 닳고 닳은 중년의 현실감각에 의해 곧장 취소된다. 이 여정은 ‘현실’ 또는 ‘상징계’로부터의 도주를 전제하지 않는, 모험 없는 모험이다. 확실한 귀환을 전제로 하는 이 출정식에는 냉소도 무력감도 없다. 둘의 이탈은 ‘상징계’로부터 승리를 구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즐기기 위함이고, 동시에 ‘상징계’를 유지하며 ‘상징계’ 내부에서 ‘실재계’의 향유를 얻길 바라는 이탈이다. 그러므로 ‘관리자’와 화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들은 모두 상징 질서의 공모자에 가깝다. 화자가 ‘관리자’와 반목한다면 그건 오직 두 연인이 ‘상징계’ 내부에서 ‘실재계’의 향유로 발목을 적시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 속에서 ‘소년’을 발견한 것은 시집이라는 단위에 ‘저항’이나 ‘냉소’와 같은 모종의 일관성을 부여하고 이를 기준으로 하나의 서사를 조직하는 관습적 독서 전략의 귀결이다. 이 중년들은 ‘상징계’를 향해 발칙한 저항을 전개하기엔 너무 늙었고, 그렇다고 ‘상징계’의 불가피성에 냉소적 태도를 품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남은 것은 질서로의 귀환뿐이다.
다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선생’의 모습은 사실 ‘헬렌’의 불안이 음각으로 파인 투사물이자 동시에 스스로 내면화한 대타자의 시선과 화자 자신의 욕망이 뒤섞인 혼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여기서 ‘헬렌’의 고통은 상징 질서의 엄혹한 권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도, 대타자의 억압이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시대가 복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대타자의 헐렁한 권위가 상징계의 균열을 덮지 못할 만큼 성기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바로크 시대를 이렇게 요약한다. “작가들은 자기가 너무 늦게 태어나서, 말할 만한 것들을 남들이 이미 모두 말해버렸으니, 그 말을 멋있게 다시 되뇌는 길밖에는 없다고 체념하면서 태평하게 제 직업에 종사했다.”
비애극Trauerspiel이라는 단어에 유희Spiel가 숨어 있는 것처럼, 김승일의 유희엔 “뜻 모를 아픔”이 몸을 숨기고 있다.
_ 민경환(2018).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 <문학과사회>, 31(2), 425~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