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9, 2019: 9:55 pm: bluemosesErudition

메타 인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가. “인지심리학자들은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고, 둘째는 ‘안다고 생각하며 남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죠. 인지심리학자들은 이 가운데 후자만 ‘진짜 자기 지식’이라고 해요. 즉,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메타인지를 점검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는 얘깁니다. 공부한 것, 습득한 지식, 읽은 내용 등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메타인지는 절대로 발달하지 않습니다.”(김경일)

: 9:34 pm: bluemosesErudition

“일본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일본 연주자의 공연을 거부하고, 일본인이 하는 식당이나 술집에 발길을 끊고, 일본 관광객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일은, 매우 애석한 말이지만 ’자발적 동원’의 길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가장 훌륭한 건 언제나 ‘승전’이 아니라 ‘평화’다.”

* 김규항은 늘 옳다. 하여 언제나 이미 훈계한다. 그러나 그는 틀리다. 자신의 발언이 전개되는 곳이 사상적 진공이란 것을, 일종의 가상세계란 것을 여전히 체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마디 발언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에, 언제나 명료한 원론만 발화하면 되기에.

* 불매를, 인권에 대한 아베 정부의 무례와 모독 그리고 오만에서 촉발된 시민의 항의로 볼 수는 없을까. 이 또한 시민 연대의 일례가 아닐까.

: 3:04 pm: bluemosesErudition

대학생들과 함께 <갈릴레이의 생애>를 읽었을 때,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갈릴레이의 자아비판이 잘 공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갈릴레이의 선택을 아예 긍정하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으며 살아서 연구를 완성시킨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식이다. 물론 갈릴레이가 죽음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분명하게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데도, 그 굴복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며 전혀 자아비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 이해심은 어디서 온 걸까? 사실 여기에는 일종의 기시감이 있다.

10여년 전에 등장한 뉴라이트의 역사관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흔히 ‘친일 미화’라고 표현되듯이 그들은 ‘친일파’(특히 자본가)의 행위를 현명한 선택으로 만들었다. 그런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는 당연히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문제는 그들을 친일파 옹호자로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토양을 바꿀 순 없다는 데 있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날이 굴복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친일파는 결코 먼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도덕적인 친일파 단죄는 겉돌기만 한다. 차라리 그런 선택을 긍정해주는 말은 위안이라도 되는데 말이다.

문제는 굴복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굴복이나 패배를 당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한,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만들어내는 기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당한 굴복을 합리화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패배의식이란 패배를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속 패배하고 있는 한 승부는 끝나지 않는다. 승부는 패배를 그만둔 순간에 끝난다.

: 12:21 pm: bluemosesErudition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한국콜마 윤동한 … 박정희와 식민지근대화론은 전후 세대의 제다이와 스타워즈다.

김용섭허수열은 “실증에 의거한 믿음”이 “믿음에 토대한 실증”임을 논증하여, 현상 이면의 실재를 제시하였다.

역사 기저의 동심이 어른의 인식을 지배할 때, 그것은 악몽이 된다. 아니, 이승만학당이라니.

: 1:18 am: bluemosesErudition

“일전에 루이스를 좋아하는 학자 두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인 김진혁 교수는 루이스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루이스의 글로 ‘변환’을 꼽았다. 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순전한 기독교>의 번역가이자 루이스로 석사와 박사를 모두 이수한 진짜 루이스 전문가 이종태 목사는 ‘변환’이 루이스의 성사적sacramental 사고를 이론적으로 가장 잘 정리한 글이라고 맞장구를 쳤다.”(홍종락, <오리지널 에필로그>, 홍성사, 2019, 157~158쪽)

August 8, 2019: 6:28 pm: bluemosesErudition

“대학 난립은 1996년 도입된 ‘대학 설립 준칙주의‘가 부추겼다. 당시 정부는 건물·부지·교원·수익용 재산 등 네 가지 기본 요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자동 인가해 줬다. 한 해 20개 대학이 한꺼번에 생기는 등 이 제도가 폐지된 2013년까지 대학 70여곳이 봇물 터지듯 신설됐다. 대학 수는 1996년 264곳에서 현재 351개로 크게 늘었다.”

: 1:11 pm: bluemosesErudition

: 2:22 am: bluemosesErudition

10. 베리타스포럼은 1992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진리를 중심 주제로 삼아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철학, 종교, 과학 등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다루는 포럼입니다.

19. 버트런드 러셀은 화성과 목성 사이에 주전자가 하나 있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며 예를 들었습니다. 만일 그런 허황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주장을 입증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러셀은 말합니다. 화성과 목성 사이에 주전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증명할 책임은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죠. 황당한 주장을 하려거든 직접 증명하라는 말입니다.

29. 거대한 우주 공간에는 대략 1,000억 개 단위의 별들이 중력으로 서로 묶여있는 은하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물론 은하들은 10만 개가량의 별로 구성된 왜소은하에서 수십 조개 이상의 별로 구성된 거대타원은하 등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 우주에는 우리 은하나 안드로메다 은하와 같은 은하가 최소한 1,000억 개 이상 존재합니다.

30.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예를 들어볼까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 250만 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곳의 빛이 우리에게 오는 데 250만 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모습은 250만 년 전 과거의 모습입니다. 빛이 우리에게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보는 빛은 그만큼 오래전에 안드로메다 은하를 떠난 빛이고, 그래서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모습입니다.

31.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100억 년 이상의 과거에 해당하는 우주 초기 모습을 직접 관측합니다. 그 끝에서 우리는 아직 별과 은하가 탄생하기도 전의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의 우주, 즉 가장 먼 과거의 시점에서 우리는 우주 공간을 처음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된 태초의 빛first light이라 불리는 우주배경복사를 만납니다. 광속의 유한성 때문에 생기는 타임머신 효과에 따라 우리는 우주의 모습을 시간의 파노라마로 현재 모습에서 138억 년 전 과거 모습까지 생생하게 관측할 수 있습니다.

32. 현대의 표준우주론은 빅뱅이라는 말로 우주의 시작을 기술합니다. 현대우주론은 20세기 초에 허블과 르메트르라는 천문학자가 각각 우주의 팽창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약 100년 전인 1920년대에 과학자들은 우주는 변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점점 더 커지는 동적인 우주임을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가 더 커진다는 우주 팽창의 발견은 우주가 어느 한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암시를 줍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의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우주가 한 점만큼 매우 작은 시작점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작점을 흔히 대폭발, 영어로는 빅뱅big bang이라고 부릅니다.

33. 빅뱅우주론에 따르면 약 138억 년 전인 빅뱅의 시점에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최소 1,000억 개 이상의 은하들이 갖는 질량과 에너지가 한꺼번에 만들어져야 합니다. …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이 지켜지는 우주에서 빅뱅이라는 시점은 모든 물질이 만들어지는 첫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36~37. 우주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감은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표현한 ‘누미노제’Numinose와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오토는 거룩한 존재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직면하면서 느끼는, 한편으로는 매혹적이고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신비한 체험을 누미노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50~51.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낳은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자연 세계에는 인과관계나 필연을 뛰어넘는 우발적인 사건이 허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의 철학을 잘 드러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숨은 변수를 찾기 위한 연구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물리적 조건을 똑같이 주었는데도 서로 다른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파악하지 못한 어떤 숨은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주장울 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숨은 변수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59. 언어나 몸짓이나 수학은 어떤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공유하는 경험이나 정보가 있어서 공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인간의 추상적 사고와 우주의 특성이 수학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서로 공명한다는 말은 인류의 지성과 우주의 특성 사이에 공유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64. 과학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자연의 실재성을 드러내는, 진화하는 지식입니다. 과학을 자연이라는 실재에 다가가는 하나의 근사로 보는 비판적 실재론이 절대주의나 상대주의의 양극단을 피하는 균형 잡힌 관점입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근원적 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을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69. 경험의 다면성과 실재의 다층성, 그리고 경험의 배반은 인간의 경험이 갖는 제한성과 이성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과학만이 실재를 파악하는 유일한 도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알려줍니다.

80. C. S. 루이스는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나는 해가 떠오른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가 떠올라 온 세상을 환히 비춘 것처럼 기독교를 통해 세상을 환히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오른 것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해가 떠올랐다고 믿는 것이 세상이 환한 이유를 더 잘 설명하는 것처럼, 신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신을 믿고 고백한느 것이 우주라는 존재와 특성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는 말입니다.

81~83. 믿음은 동의가 아니라 헌신을 요구합니다. 진리는 증명이 아니라 헌신을 요구합니다. 내가 무엇을 진리라고 믿는다는 말은 내 삶을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중략) 우주가 던지는 의미심장한 질문들은 단지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주와 연결된 인류의 존재와 나의 존재 의미에 관해,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다음 단계의 질문들을 마땅히 던져야 합니다.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하는 그 질문들이 단순하고 사변적인 지적 동의를 넘어 우리 삶의 헌신을 끌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99~103. 헤르만 도이여베이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의 말을 빌려 표현해 보자면, 우리가 대학에서 교육하고 연구하는 분과학문들은 현실의 여러 ‘양상들’modalities을 각각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도이여베이르트를 따라 어떤 과학이라도 그 과학이 탐구하는 고유 대상 영역에 관련해서 고유의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여기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현상도 다른 현상과 완전히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 분과학문들은 각각의 대상이 되는 영역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이것이 다른 영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자면 일종의 개별 영역의 존재론과 영역 상호 간의 통합 존재론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이름을 언급했던 도이여베이르트의 작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존재론을 구축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103~104.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유명한 강의 <형이상학 입문>에서 “왜 무엇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Warum ist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mehr Nichts?라는 물음을 다룹니다. 하이데거는 이 물음이 그 지위를 따라 “모든 물음 가운데 으뜸 되는 물음”이고, 가장 넓은 물음이고 근원적인 물음이라고 단정합니다. … 이 질문을 물리학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의 질문으로 처음 구성한 철학자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들>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히 물리학자로서만 얘기해 왔다. 이제는 비록 일반적으로 별로 적용되지는 않기는 하지만 커다란 원리인, 충분한 근거가 없이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리, 즉 사물을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왜 그것이 그렇게 발생하고 달리 발생하지 않는가를 결정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진술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원리를 사용함으로써 형이상학으로 고양되어야 하다. 이 원리가 정해지면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pourquoi il y a plus tôt quelque chose que rien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109. 칸트는 ‘사물 자체’Ding an sich와 ‘의식 일반’Bewusstsein überhaupt 개념을 통하여 진리가 상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은 분명 초월하지만, 존재하는 세계의 진리는 인간의식을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식의 판단 작용에 자리 잡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현상계와 관련된 ‘진리의 처소’, ‘진리의 자리’locus veritas는 (우리를 에워싼 바깥 현실이 아니라) ‘판단’이라고 칸트는 분명히 못 받았습니다.

128. 앨빈 플랜팅가 같은 철학자는 과학자들이 대부분 수용하는 진화 현상은 철학적 자연주의보다 오히려 유신론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신론은 깊은 차원에서 심지어 진화생물학을 포함하여 과학과 갈등이 없다고 플랜팅가는 주장합니다.

129~130. 철학적 자연주의에는 설계나 계획, 의도, ‘올바른 기능’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설계나 의도와 같은 ‘올바른 기능’ 개념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질병, 정신건강과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정상적이며 무엇이 비정상적인지, 어떤 상태가 제대로 돌아가는 상태이며 어떤 상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들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플랜팅가는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이와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는 어떤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알려면 설계 계획에 따라 우리의 지적 능력이 적합한 환경 가운데서 제대로 기능하여 참된 믿음을 성공적으로 산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연주의 조건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33.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The only incomprehensible thing about the universe is that it’s comprehensible)라고 말했습니다.

135. 창조를 20세기 초중반부터 교회 내에서나 학계에서 “창조인가, 진화인가?”라는 물음 가운데 양자택일의 문제로 제한해 버린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치 진화를 수용하면 창조를 부인해야 하고 창조를 수용하면 진화를 부인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상황이 꽤 오랜 세월 지속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아직도 강하게 강요되는 분위기가 있음을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현대 과학이 반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인 것처럼 교회 안에 잘못된 인식을 심을 뿐 아니라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를 반과학 집단처럼 보이게 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138. 신학자 칼 바르트는 창조와 언약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조는 언약의 외적 근거이고,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146~147. 포스트모던적인 반실재론을 따르면 주체 바깥에는 실재하는 존재, 실재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나 사회 관습, 인간의 상상력 등을 통해 만들어 낸 인간의 구성 활동의 산물입니다. 자연주의를 따르면 설계 계획을 따라 올바르게 기능하여 참된 믿음, 참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적 비판적 실재론을 따르면 이 세계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구조와 질서를 통하여 설계하고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함께 지음받은 세계를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155. 진리는 증명되는 게 아니라,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볼 때 오히려 세상이 더 정확하고 잘 보이기 때문에 진리인 줄 알게 됩니다.

163. 노우드 핸슨Norwood Russell Hanson이 관찰의 ‘이론 의존성’theory-ladenness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일상의 지각 행위나 실험실에서의 관찰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이론에 의해 진행된다는 생각이지요.

185. 진화론 관점에서 도덕을 보면 생존을 위한 인간의 공동 전략 정도로 이야기할 텐데, 전통적인 도덕 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법을 강조합니다.

187~188. 존 헤어(John E. Hare) 같은 경우는 그렇게 어려운 논리는 아닌데, ‘모럴 갭’moral gap 이론입니다. 그는 두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는 도덕 명령으로, ‘우리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도덕적일 수 있는가?’ 히는 문제입니다. 그는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능력 사이에 있는 격차에 주목합니다.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의 열쇠가 하나님의 명령에 있다면, 실행 능력과 실제 실행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창조, 타락, 구속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도덕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같이 주셨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그 능력이 크게 저하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그 능력을 다시 상승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게 한다고 헤어는 봅니다. 그런데, 존 헤어가 보기에 진화론 가운데도 무신론적 진화론은 도덕적 명령의 요구 자체가 매우 낮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능력 또한 매우 낮게 처음부터 설정합니다. 둘 다 비슷하게 낮은 상황에서 정말 인간이 도덕적으로 상호 존중하고, 상호 공동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죠. 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생존 투쟁은 강자의 논리이며 강자의 정의가 주도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지지하고, 어떻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그에 대한 마땅한 답변이 없습니다.

200. 1687년에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나오면서 천동설은 자취를 감추고 완전히 지동설로 전환됩니다. 신학계에서도 1687년 이후에는 사실상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사라집니다. 뉴턴의 작업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와 신학계는 거의 천동설이 지배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회전론>이 1543년에 나왔습니다. 이 책 출판을 주선하고 임종 직전의 코페르니쿠스에게 들고 간 사람이 루터파 목사인 오지안더Osiander였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은 말할 것 없고 루터나 칼뱅, 그리고 대부분 개신교 신학자와 성도들은 천동설을 계속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천동설이 포기되고 지동설이 자리잡기까지는, 만일 뉴턴의 책을 기준으로 삼자면 144년이 걸렸습니다. 1700년 이후로는 더이상 천동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202~203. 기독교 전통에는 크게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이미 우리가 참된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적 탐구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를 지지하고 따른 이들은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대다수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입장을 따랐습니다. 클레멘트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태도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이나 철학, 역사 등과 관련한 지적 추구를 해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오랜 전통입니다. 칼뱅도 이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이교도들이 발견한 것도 만일 참이라면 그것도 참이라고 칼뱅은 보았습니다. 디도서 주석에서 칼뱅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서 나온다”Omnis veritas ex Deo sit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불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비,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고상한 것, 참된 것을 인간이 발견하고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칼뱅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가 발전시킨 ‘공통은혜’Common Grace 교리입니다. 공통은혜는 신자와 불신자가 다 같이 학문이나 예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학문 영역이나 다른 문화 영역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공통은혜에서 오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 그리스도의 왕권에서 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카이퍼는 이것을 “왕을 위하여”Pro Rege라고 표현하였습니다.

204. 제가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기독교적 축구는 없습니다. 물론 축구를 기독교 정신에 맞게 할 수는 있겠지요. 축구 규칙에 맞게 열심히 뛰고, 골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심판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 정신에 맞는 축구이지, 기독교와 축구를 합해서 기독교적 축구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가령, 태클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축구에서 태클을 못하게 규정을 바꾼다든지 헤딩을 못하게 한다든지 하면 그건 축구가 아닌 다른 스포츠가 되어 버립니다. 과학도 기독교적 과학을 만들면, 과학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됩니다. 창조과학처럼 말이죠.

205. 좋은 과학이 기독교 과학이고, 좋은 축구가 기독교 축구죠.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철학이 기독교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하려고 해야지요. 철학을 하면서 성경 몇 마디 인용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인다고 좋은 철학일 수는 없고 따라서 기독교 철학일 수도 없습니다.

205~296.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말을 빌리면, 과학의 서사가 있고 종교의 서사가 있습니다. … 이 두 서사를 독립적으로 읽어야 각각 의미가 있지, 둘을 섞어서 읽으면 두 서사가 모두 망가집니다. (중략) 학문이나 특정 분야의 내적 통일성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과학을 과학답게, 축구를 축구답게 하면 됩니다. 그런 과학과 축구를 두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적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불교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과학이 밝힌 내용을 기독교적 서사로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지를 놓고 또 다른 차원에서 통합이 일어나야 합니다. 서사 자체를 섞거나 고유한 방법론의 범주를 넘으면 곤란해집니다. 개별 분야는 독립된 영역으로 두면서도 거기서 나온 결과들을 종합해서 해석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_ 강영안, 우종학, <대화>, 복있는사람, 2019

: 2:06 am: bluemosesErudition

“교도소선교회 설립자 찰스 콜슨, 인간게놈프로젝트 책임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 등이 <순전한 기독교>의 도움을 받고 회심을 경험했다.”

August 7, 2019: 7:47 pm: bluemosesErudition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의 신앙적 자서전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이 왜 크리스턴이 되었는지가 아닌,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엇는지 쓰려 한다고 밝힌다. 회심의 철학이 아니라 회심의 현상을 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심 전후로 자신에게 있었던 생각과 사건을 적어보니, 이전에 알던 그 무엇보다 신비로웠다고 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자신이 적어 놓은 현상을 보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초청한다. 과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회심과 관련된 생각과 사건을 실험 보고서처럼 적어 놓고는 독자에게 그것을 연구해서 결론을 내리라고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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