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연극'


August 17, 2019: 12:57 pm: bluemosesErudition

자아 연출의 사회학, 연극으로서의 사회적 삶.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분투하면서 우리가 구축해온 스스로에 대한 관념을 가면이라 한다면, 가면은 우리의 참자아,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자아다. 결국 역할이라는 것은 우리의 제2의 천성, 인성을 구성하고 통합하는 성분이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 이 세상에 들어와, 성격을 획득하고, 그러면서 사람이 된다.”(어빙 고프먼, 1959)

May 20, 2018: 8:25 pm: bluemosesErudition

362~363.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그것에 앞서는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 현존하는 기념비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질서는, 어떤 새로운 (진정으로 새로운) 예술작품이 그것들 사이에 도입되면서 수정된다.”(<전통과 개인의 재능>, 1919) 인용하기도 새삼스러운 엘리엇(T. S. Eliot)의 이 말은 백년 전에 옳았듯이 지금도 옳다.

365~366. 김행숙이 아니었다면, 방금 자살을 기도해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한 소녀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을, 살아 있는 인간들의 몸을 통과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이승에 남기를 선택한 어느 귀신의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었을까. 또 황병승이 아니었다면, 남자로 살아가기보다는 학대를 받더라도 여자로 살기를 택한 어느 상처투성이 트랜스젠더의 고통스러운 반어의 말을, 조금 전에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토한 어느 지친 웨이트리스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이런 시들이 더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김행숙과 황병승이 결국 승리했다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시를 읽기 시작한 독자는 이 시인들이 한국시의 영토를 어떻게 얼마나 넓혔는지 가늠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다시 보아도 결정적인 것은 역시 이것이다. 2000년대의 어떤 시인들 덕분에 한국시는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다. 이런 시들로는 시인의 퍼스낼리티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것은 일종의 위조 신분증이다 위조 신분증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란이었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축제였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무에서 창조된 유’였던 것은 아니다. 당장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이라 불리는 저 오래된 기법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시인 자신과는 명백히 다른 어떤 화자가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순전한 혼잣말이 아니라 어떤 청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발화인데, 청자가 직접 시 속에 끼어들지는 않지만 화자의 말을 통해 청자의 반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한명인데도 연극적인 대화의 공간이 생겨난다는 점이 이 기법의 묘미이다. 그래서 독백이되 극적인 독백이다. 낭만주의 시기에 이미 이 기법의 맹아가 나타났다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대표하는 두 시인인 테니슨(A. Tennyson)과 브라우닝(R. Browning)에 의해 (특히 후자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영문학계의 정설이다. 앞 세대인 낭만주의 시인들의 내면 고백에 싫증이 났다는 듯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들이 가공의 화자 뒤로 숨어버리자 시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가능해졌다.

368~369. 이런 시들이 나오고 나서야 우리는 이전 시기의 시들이 재현했던 인식과 정서가 협소한 범위 안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로 많은 시인들이 그 인식과 정서의 대륙에 잇달아 상륙했다. 그러니 이 새로운 화자들을 그저 화자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들뢰즈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책에서 ‘개념적 인물’을 창조하고 그를 통해 사유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김행숙과 황병승의 (혹은 2000년대의 몇몇 시인들의) 시에는,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 어떤 ‘감응적 인물’이 존재한다. 발화의 주체라는 점에서는 일단은 화자지만, 시를 지배하고 있는 인식과 정서의 주체이기 때문에 단순한 화자 이상이다. 그들은 (스스로) 감응하면서 (독자를) 감응시킨다. 어쩌면 김행숙과 황병승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창조한 감응적 인물들의 필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황현산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이 시인들의 시쓰기는 본질적으로 번역의 과정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 이후로,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후배들 덕분에, 한국시에서 이른바 ‘시적인 ‘ 문장에 대한 통념적인 합의는 거의 무의미해졌다. 2000년대 시는 감응적 인물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딕션(diction)도 함께 발명해야 했다.

370. 왜 하필 2000년대 중반에 이같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본 작업은 드물다. 혹시 예술체제에서의 이같은 변화는 정치체제에서의 어떤 변화와 연동돼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단서로 삼아봄직한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어쩔 수 없는 근간이 되고 있는 ‘대의’와 문학의 주도적 방법론 중 하나인 ‘재현’이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서로 다른 번역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371. 먼저 빅토리아 시대를 행해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조언을 구해보면 어떻까. 극적 독백은 왜 하필 빅토리아 시대에 성행했는가. 여러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마침 우리가 앞에서 예고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한 사례가 있다. “극적 독백은 [낭만주의 시기의] 자기힘몰적 내면화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19세기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재현ㆍ대의(representation) 문제와 불가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373~374. 지금은 대의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단지 대표가 자기 성원을 얼마나 충분히 대표하는가(대의불충분성의 문제) 이전에, 대표체제 바깥에 있는 자들을 대표들이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대의불가능성의 문제)”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낭만주의의 내면 지향에 대한 반발로 빅토리아 시대의 극적 독백이 등장했다는 관행적인 논리와 유사하게, 1990년대 시의 내면 지향에 대한 미학적 피로감 때문에 이제는 다른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왜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1인칭 내면 고백의 시들이 갑자기 지겨워졌던 것일까. 어느 시기에 개개인의 취향이 집합적으로 변했다면 거기에는 정치적 조건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정치적 조건이 어떤 (무)의식적인 매개를 거쳐 미학적 혁신을 낳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사의 시각일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는 존재가 단지 1표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환멸과 권태가 시에서 1인칭 ‘나’에 대한 탐구를 진부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또 그 1인칭의 빈자리에, 1표만큼의 권리조차도 행사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좌절과 분노가 다양한 3인칭들의 형상으로 밀고 들어온 것은 아닌가.

382~383. 2010년대의 한국시는 이 사회에서 충분히 대의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대의구조 바깥에 버려져 있는 감응의 구조들을 재현할 수 있는 문을 하나씩 열어나가게 될 것이다. 다음 문장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은 요청으로 읽힌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인 것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이 말해지는 방식, 이를 통해 표명되는 역량들과 무능들이다. 근래 자주 인용된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문장이다.

_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제41권 제1호 통권 159호, 2013.3, 362-383쪽.

February 15, 2018: 1:32 pm: bluemosesErudition

“고객만족은 구매한 후의 소비경험과 소비자의 사전기대가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Richard L. Oliver)

고객만족을 위해서는 전략과 시스템과 사람이 한 박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객이 기대한 만큼의 서비스를 제공받아 만족했다면 3명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며, 약 40~60%의 고객이 다시 우리 회사를 찾게 됩니다. 반면, 기대한 것보다 월등한 수준의 놀랄만한 서비스를 제공받은 고객은 18명에게 전달하고 약 90~100%가 우리 회사를 다시 찾게 됩니다.

고객은 마음을 얻어야 할 대상이다. 고객만족이란 고객의 욕구(Needs)와 기대(Expect)에 최대한 부응하여 그 결과로서 상품과 서비스의 재구입이 이루어지고 아울러 고객과의 신뢰감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고객만족은 선순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의 순간(MOT: The Moment of the Truth)이란 스페인 투우에서 투우사와 소가 일대일 대결하는 최후의 순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 투우사가 소의 급소를 찌르는 순간이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순간’ 또는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순간’이 바로 MOT다. CS에선 이를 차용해 “고객의 만족 불만족을 결정짓는 15초”를 일컬어 MOT라 한다.

한 순간의 부정적 이미지는 결국 전체 서비스 수준을 “0″으로 평가하도록 만든다. 즉, 100 - 1 = 0 이다.

고객이 기업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직원의 불친절이다. 미국 품질관리 협회에 따르면 고객이 이탈하는 이유의 68%가 접점 종업원의 불친절이었다. 제품에 대한 불만은 14%, 가격이나 기타 사유는 18%에 그쳤다. 체감이 관건이다.

심리학자 메러비언(Mehrabian)에 따르면, 첫 대면 시 인상을 결정 짓는 요소는 시각적 이미지 55%, 말하는 태도 38%, 말의 내용 7% 순으로 나타났다.

인물에 대한 성격을 묘사하는 형용사 나열 및 인상 기록에 관한 Asch의 연구(1946)는 초두효과 내지 맥락효과를 입증한다.

측정할 수 없다면 개선할 수 없다(If you can’t measure it, you can’t improve it.) 재무적 지표가 과거의 성과라면 고객만족도(CSI, Customer Satisfaction Index)는 미래의 지표이다. 내외부 고객만족도와 수익률(기존고객유지율, 신규고객확보율 등) 및 시장 점유율 간의 상관관계 파악이 관건이다.

안정형은 화가 나더라도 상당히 인내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상대가 배려를 하면 곧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한다.

악성 민원응대 시, 충분히 경청하고 다소 시차를 두어 상호 감정을 누그러뜨려 처리한다.

불만고객은 조기치료를 통한 전화위복의 계기를 선사한다. 약 4%의 고객 클레임은 기업에 기대를 걸기 때문에 발생한다.

감정 노동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규제하는 행위이다. 감정의 부조화는 불가피하다. “지금 나는 연극을 하고 있어. 나는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거야.”

December 9, 2017: 4:29 pm: bluemosesErudition

180. 브라이언 웨이는 피터 슬레이드가 행했던 연극(theater)과 드라마(drama) 구별하기를 한층 더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러나 웨이는 인간 발달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아동 드라마(child drama)를 예술로 간주하는 슬레이드의 개념을 과감하게 버렸다. (중략) 드라마와 연극의 분리는 웨이에 의해 분명하게 이뤄졌다.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활동이 있다. 하나는 연극(theater)이고 다른 하나는 드라마(drama)이다.” 그는 이 용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인간의 발달이라는 이 책의 목적을 위해 다음 두 가지 활동에 있는 주요 차이점을 밝히고자 한다. ‘연극(theater)’은 배우와 관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연관되어 있고, ‘드라마(drama)’는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관계없이 참여자들의 경험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

235. 브레히트에 따르면, 연극은 철학자를 위한 장소가 된다. 월셔는 브레히트의 ‘몰입하면서 거리두기’(involved detachment) 개념이 모든 종류의 좋은 연극에 적용될 수 있지만, 브레히트의 학습 연극은 이 몰입하면서 거리두기라는 변증법적 양상에서 ‘거리두기’를 더 강조하려고 의도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히스코트가 전시장면을 사용할 때 의도한 측면과 같다. 관개이 의미를 읽도록 의도하여 만든 장면이, 나에게는, 연극을 연극이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_ 개빈 볼튼, <교실연기란 무엇인가?>, 연극과인간, 2012.

August 6, 2017: 12:53 am: bluemosesErudition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35. 영화에서 ‘연기acting’하는 것이 보인다면 그 배우는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연희performing’를 하는 것이 포착된 순간, 배우로서의 기회는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배우는 아주 내밀한 사적 공간에서 사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개런티를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관객을 위해 낭독하고 있을 뿐입니다. 착각이여 안녕! 배우라는 직업이여 안녕!

41. 무대였다면 관객과의 거리가 6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배우가 대사를 깜빡해도 그 순간은 어찌어찌 얼버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는 의도하지 않은 조그마한 멈칫거림까지 간단없이 폭로해버립니다. 만약 촬영 스태프 중 한 명이 비록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라도 제 시선 앞으로 지나가면, 저는 즉시 다시 찍자고 합니다. 설사 제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았고, 감독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카메라는 필시 제 시선 맨 끝자락의 실낱같은 흔들림을 담아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5. 영화에서 매순간 잠재적 힘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배우의 ‘반응reaction’입니다. 영화 촬영 시에는 클로즈업에서 시선 처리와 더불어 상대역의 대사를 잘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굳이 목소리를 키우거나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무턱대고 동작을 크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49. 영화에 첫발을 들여놓는 연극배우라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촬영 첫날부터 자기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서 소화하는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자신이 연기해내야 하는 장면을 자기 나름대로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자기가 맡은 배역에 대해 감독과 의논하는 과정 없이, 다른 배역을 맡은 배우들과 별도의 상의 없이, 세트 리허설이라는 연습 없이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영화는, 연극배우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세례식처럼 한 번에 물속에 잠겨야 됩니다. 연극이 차차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영화는 이미 만들어진 것입니다.

50. 촬영 시 다른 배우들의 연기에 도움을 받건 방해를 받건 관계없이, 설사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더라도, 영화배우라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역이 정확히 해준 듯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직접 카메라에 눈을 대고 장면을 보지 않고서는 여러분이나 상대역의 연기가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61. 대사를 암기할 때는 주어진 대사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까지 큰 소리로 연습하십시오. 만약 다른 여러 표현 가능성들을 찾게 된다면 그것 역시 발전시켜 두십시오. 단, 그런 것들은 일단 주머니 속에 모셔두십시오. 만일 감독이 당신 나름의 뛰어난 해석을 퇴짜놓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공포의 순간을 최소한 백지 상태에서 맞닥뜨리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리 준비한 것을 보여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66.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에는 대사에 대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 배우에게 대사를 하십시오. 상대 배우도 당신의 대사와 연기를 지금 막 듣고 본 것인 양, 그게 마치 처음 겪는 일인 양 반응하면서 당신의 대사를 새롭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대사에 대한 생각에 붙들려 있게 되면 다음 대사를 받을 때 상대 배우의 대사는 귀에 들리지 않고, 연기는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보일 것입니다.

67. 당신이 다음에 할 대사를 말할 시간이 한참 남아 있어도 머릿속은 이미 다음 대사에 가 있을 겁니다. 대본에 따라서는 간혹 상대의 대사를 중간에 가로챌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 차례를 기다려 반응을 보여야 할 때가 되어서야 사고를 시작해야 합니다. 상대역의 대사 가운데 그런 생각을 시작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단어를 미리 골라놓으십시오. 그 말에 맞춰서 본인의 반응을 생각하고, 자기 대사를 말할 수 있게 대비하면 됩니다.

72. 동작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정확하게 반복하려면 맡은 배역의 습관적 동작이나 움직임을 정확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설계하십시오. 지나침은 금물입니다. 영감을 받은 즉흥성이 요구되는 분야가 아니니까요. 골프채를 다룰 때처럼 심플하게 하십시오. 어떤 동작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일단 계획부터 짜십시오. 자신이 해야 할 신체적인 움직임을 잘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짜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에 완전히 배도록 연습하십시오. 한 동작을 완전히 동일하게 여러 차례 반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79. 분장팀은 전문가들이니 당신이 특정 화장품 회사와 엮인 게 없다면 이들 손에 맡기는 것이 상책입니다. 더구나 세상만사 소식이 흘러나오는 중심지가 분장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의 행동거지에 대한 뒷말이 금세 우주로 퍼지게 되는 것이죠.

83. 각각의 문들이 어느 쪽으로 열리는지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당신이 맡은 배역이 그 문을 1,500번쯤 들락거렸던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쪽으로만 열리는 문을 밖으로 밀어서 나가려고 하거나, 아주 잠깐이라도 문 앞에서 머뭇거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거기가 정말 당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광고하는 꼴이 됩니다. 당신이 집이기 때문에 뭐든 아주 익숙하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트장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리 꿰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86. 예측은 배우들에게 공공의 적입니다. 카메라는 놓치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측된 연기는 영화에서 풍기는 날것의 감흥을, 특히 자연스러운 즉흥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89. 스크린에서 멋있게 보이고 싶으면 당신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망가뜨릴 수도 있는 카메라맨에게 잘 대해주십시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자기 일을 존중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은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잘 대해줘라”라고 말한 것은 아침에 만나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라는 뜻이지, 뇌물을 찔러주거나 훌러덩 벗고 육탄 돌격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멋지고 아름답게 카메라에 찍히고 싶다면 예의를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92. 영화의 경우 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실제처럼 전력을 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화 연기는 위험이 관건입니다. 연습한 위험은 더 이상 위험이 아니게 됩니다. 리허설 때 모험을 한다면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모험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카메라가 돌아가면 그때부터는 리허설 이상의 무언가를 연기해 그 장면을 생동감 있게 만드십시오. 그래야 상대 배우도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연기할 수 있습니다. “액션”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은 실제로 놀라움을 안겨줄 궁극적인 위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다음 모든 수단을 다해서 단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것보다 좀 더 멀리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합니다.

94. 이게(*상대배우가 연기를 못하지만 자신은 집중하여 제대로된 연기를 끌어내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연기할 때 감정이 메말라버리는 유일한 경우가 바로 상대가 연기를 못하는 데 온 신경을 뺏길 때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또한 현장에서는 감독이 대장입니다. 감독은 최종 편집 시에 당신의 연기가 담긴 샷은 모두 사용하고 다른 배우 부분은 카메라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로만 쓸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포함된 샷은 애초부터 감독의 관심 밖이었을 수도 있고요. 감독의 최초 의도에 상관없이 편집 과정에서 마음이 바귈 수도 있는 일입니다.

97. 영화에서는 당신의 연기나 상대의 연기에 반응을 보일 때의 리얼리티를 언제라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달리고나서 숨이 찬 상황이라면 실제로 달려서 숨이 차게 하십시오.

147. 한 인물이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훔치십시오. 보이는 것은 무엇이건 훔치세요. 다른 배우가 만들어놓은 인물 중에서라도 가능하다면 훔치세요.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최고만을 훔치셔야 합니다.

149. 예전에 제가 유랑 극단에서 술 취한 연기를 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연출가가 제 연기를 멈추게 한 뒤 이렇게 말했죠. “자네는 지금 술 취한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네! 술 취한 연기를 하는 배우를 연기하고 있는 것뿐이네. 취한 것을 연기하는 배우는 비틀거리며 말도 흐리지만, 진짜 취한 사람은 바르게 걷고 말도 똑바로 하려 하지……. 취한 사람은 취하지 않은 듯 보이려고 자신을 통제하려고 한다네.”

150. 코미디 영화에서 ‘웃기려고 애쓴다는 것’은 분명 죽음입니다. 첫째 당신은 실제 남자 또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져야 재미있을 겁니다. 만약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지는 코미디언을 연기하면 아무도 웃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실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52. 어떤 인물을 구축하기 위해 세부적인 디테일을 훔칠 요량이라면 먼지 풀풀 나는 유형화된 인물 말고, 실제적인 것을 훔치십시오.

155.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 나름의 해결책은 상대 여배우에게 거침없이 농담을 던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여배우는 제가 그 장면에서 무언가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가질 테지요. 감독이 “컷”을 외치는 순간 상대 여배우에게 실제로는 어떠한 열정도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또다시 열심히 농담을 합니다. 그런 장면들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지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 촬영에 있어 감정 이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여배우에게 은연중 알리는 거지요. 여배우에게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자기 엉덩이를 쓰다듬게 내버려둘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이 직업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수줍음이 생길 틈이 없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감독들이 당신에게 직접 연기를 해 보이는 유일한 경우가 러브신이라는 겁니다. 갑자기 감독은 여배우를 정확히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당신에게 몸소 실연해줍니다.

162. 역사물에서는 그 인물에게 어떤 것이 실제적인지를 찾는 연구가 매우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보통 다른 시대나 장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정형화된 견해를 갖고 있곤 하죠. 그러나 실제로 연구해보면 그 유형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런 발견은 배우로서의 삶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줍니다.

173. 지저분하게 비열한 행동을 하는 배우들은 눈에 확연히 띕니다. 연극 무대의 안쪽을 차지하는 사람처럼 슬금슬금 뒤쪽으로 이동해 자기를 상대하는 다른 배우들이 카메라를 등지게끔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장면을 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에 머리를 돌린다거나 손을 살짝 움직임으로써 초점을 훔치는 사람입니다.

176. 저는 다른 사람의 연기를 방해하는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몫은 감독에게 맡겨두십시오. 감독은 당신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특징을 잡아낼 수도 있고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편집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배우가 무엇을 하든, 대사를 멈추든 날려먹든, 당신은 그 장면을 올바르게 끝까지 해내거나 대장이 “컷”이라고 외칠 때까지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180. 당신에게 스턴트를 직접 하라고 요구하는 유일한 경우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촬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마지막 촬영 때입니다(그렇기에 절대로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더구나 잘 생각해보면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평생 훈련받은 직업적인 스턴트맨이 항상 세트장에 대기하고 있는데 배우더러 하라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스턴트맨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니 기억하세요. 자기가 직접 스턴트를 했다고 하는 배우가 있다면, 거짓말쟁이거나 이기주의자거나 아니면 둘 다라는 것을요.

185. 만약 당신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 바보처럼 보이고, 스스로 바보처럼 느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당신이 고함지르는 상대가 제작자일지라도 말이지요). 그 뒤로 저는 절대 일하며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당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는 절대로 화내지 마십시오. 그건 엄청나게 부당한 행위니까요.

186. 만약 당신이 편집용 프린트를 보게 된다면 자기만 보일겁니다. 그러나 사실 편집용 프린트로 보는 캐릭터는 당신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낯선 사람처럼 느껴질 겁니다. 만일 좋은 감독이라면 당신이 어떻게 연기했는지 편집용 프린트보다 훨씬 정확히 이야기해줄 겁니다. 제 생각에 편집용 프린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초점이 잘 맞춰졌는지, 촬영기사가 망치지나 않았는지 정도라고 봅니다. 만약 당신이 편집용 프린트를 보러가지 않는다면 일찍 귀가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189. 감독은 수시로 배우 곁에 있으면서 테이크가 진행되는 매 순간 당신을 보살필 것입니다. 그것은 배우의 감독일 때입니다. 어떤 감독들은 배우에게 관여하지 않습니다. 배우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생각할 뿐이지요. 어떤 경우든지 칭찬받을 생각은 마십시오. 감독이 당신 연기에 만족했다면 바로 다음 장면 촬영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넘어가지 않았겠지요. 그게 유일한 신호입니다.

193. 어쨌든 감독은 두목이고, 배우는 감독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배우들은 감독의 말에 따르지 않고, 양보하지도 않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만약 젊거나 영화 촬영이 처음인 배우라면, 감독은 자기 의지 대로 감독하도록 하고, 당신은 본업인 연기에 집중하면서 감독의 지시를 따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193. 우디 앨런은 촬영할 때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하기 때문에 뭐가 리허설이고 뭐가 테이크 촬영인지 통 분간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찍고 또 찍지요. 클로즈업은 없습니다. 전부 롱 샷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진행됩니다.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는 집안에서 카메라를 360도로 돌리면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방음 장치도 안 되어 있는 실제 뉴욕의 아파트 중 한 곳에서요. 오전 8시 30분에 모여 동작을 설정하고 나면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촬영이 시작됩니다. 조명을 설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지요. 우디는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모든 것을 다 리허설했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거의 현미경 수준이었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모든 것들이 애드리브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은 끊임없는 리허설과 리허설과 리허설의 과정을 거쳐 확실해질 때까지 준비한 것입니다. 테이크라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리허설 느낌으로 시작되는 촬영은 배우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풍부한 상상력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194. 다른 감독들은 장면들을 전부 분해하지요. 존 휴스턴 감독처럼요. 그는 마스터 샷을 찍다 중단합니다. 전체를 찍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까지 찍어둘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죠. 경험이 적은 감독은 편집 과정에서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촬영하겠지만, 휴스턴 감독의 경우 이 분야의 명수입니다. 이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걸 어떻게 찍을지 결정해놓았을 겁니다.

198. 점잖은 감독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캐럴 리드는 “컷”을 외칠 때 배우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온갖 재치를 발휘합니다. 캐럴은 항상 못이나 동전을 쥐고 다녔지요. 배우가 대사를 제대로 못하거나 까먹을 때, 혹은 장면 진행을 매끄럽게 하지 못한 경우 못이나 동전을 떨어뜨리고는 “컷. 조용한 장면이었는데……. 이왕 촬영을 멈춘 거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해볼까요?”라고 말하곤 했지요.

200. 영화 대본은 성경이 아닙니다. 대본이 절대 불가침의 성역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첩보국> 촬영 첫날 감독은 대본을 바닥에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생각하는 대본이란 이런 거야”라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그저 서서 멀뚱멀뚱 서로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촬영합니까?”라고 물었지요. 결국 감독은 제 대본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즉흥성을 많이 요구했지요.

205. <셜록 홈즈와 나 Without a Clue>(1988) 후시 녹음을 할 때 편집된 프린트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칼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다가 제가 “영화 전체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을 잘라냈네요. 제가 싸움 도중에 느리게 움직이는 부분 말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편집기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알아요. 맞는 말씀이에요. 영화 속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어요. 그러나 5초나 되는 분량이었죠. 그 장면은 모든 여세를 몰아 집중을 요하는 마지막 장면이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그 한 장면이 뛰어나게 재미있더라도 영화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코미디 마지막에서 속도를 늦출 수는 없잖아요.” 그러고 나서 저의 기막힌 연기 부분이 들어간 싸움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말이 옳더군요. 그 부분이 사라진 것은 참 안된 일이지만 그 장면은 삭제되는 것이 옳았습니다. 편집기사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정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도 “만약 편집기사들이 그 장면만 안 잘랐어도 오스카상을 따놓은 당상인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206. 그러나 편집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편집실에서 당신을 구제해줄 것이라 믿고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감독들은 촬영장에서 제대로 하기를 바랍니다. 잭 레먼과 지독하게 완벽을 추구해온 조지 쿠커 감독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잭은 브로드웨이 무대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조지는 그가 찍은 첫 번째 영화의 감독이었습니다. 잭은 같은 장면을 거듭 반복했고 조지 역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컷. 줄여. 잭. 줄여.” 그러면 잭은 또다시 반복했고요. 그러면 조지는 또다시 “컷. 줄여. 잭. 줄이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끝내 잭이 “여기서 더 줄이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라고 대꾸하자, 조지는 그제서야 “이제야 알아듣는구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211. 영화계 스타가 되려면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렸을 적 저는 런던 토박이였고 배우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재들을 수집했습니다. 말하자면 인상적인 패키지를 만들어 이용한 것입니다. 안경을 쓰고 시가를 피우며 눈에 띌 만한 곳이면 어디든 얼쩡거렸습니다. 그랬더니 “안경 쓰고 시가 피우는 놈”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그는 노동자 계급 역을 맡는다던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안경 쓰고 시가 피우며 노동자 역할을 맡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제가 매우 얌전하고 순종적이라는 소문이 돌자 저는 “안경 쓰고 시가를 피우며 노동자 역할을 맡는, 함께 일하기 쉬운 배우”가 된 겁니다.

212. 배우로서의 성공은 끊임없이 행동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협상력이나 대사의 수, 배역의 비중을 재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역할이건 하고 또 하세요.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마세요.

218. 좋은 영화에서보다 나쁜 영화에서 연기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끔찍한 시나리오는 연기를 무척이나 어렵게 만듭니다. 장차 당신 연기 이력에서 가장 쉽게 한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뛰어난 시나리오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지요.

218. 영화배우로서 저를 스스로 분석해볼 때, 배우로서 저의 매력은 한 눈에 승자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숀 코너리나 찰스 브론슨의 경우 확실한 승자입니다. 그러나 저는 패자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고 영화에서도 패자 역할을 많이 했지요. 저는 인생에서 실패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들이 제 인격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자신이 어떤 느낌을 주는 사람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219. 할리우드 사회는 A급 팀, B급 팀, C급 팀, 즐기는 팀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A급 팀은 극히 소수이지요. 로버트 레드포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실베스터 스탤론과 소수의 스튜디오 대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 팀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기 속한 사람들은 B급 팀, C급 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일자리를 부탁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즐기는 팀과는 어울립니다. 저는 즐기는 팀에 속해 있고요. 저는 꽤 재밌는 사람이고, 매우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가 있으며, 제 일자리를 부탁하지 않기 때문에 저녁 만찬에 초대받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즐기는 팀에 속해 있지 않았다면 B급 팀에 속해 있을 텐데, 그럴 경우 초대받는 일은 없었겠지요.

226. 영화계에서 앞으로 제가 할 일을 생각해보면 결국 감독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적어도 3개월 전부터 준비 작업을 시작해야 하고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도 4개월 정도는 계속 일을 합니다. 감독이 영화 한 편을 만드는 시간에 저처럼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의 경우 네 편을 찍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감독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 때문입니다.

June 12, 2017: 10:53 pm: bluemosesErudition

심사평을 쓸 때 심시위원이랍시고 응모자들을 훈계하는 일은 가급적 하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훈계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딘가에 이미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시는 미학적 가치, 정서적 가치, 인식적 가치를 갖는다(최소한 셋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렵고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철학 분야의 입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 기본적인 얘기를 또 꺼낸 것은 이상하게도 이 셋 중에서 어느 하나가 요즘 들어 유독 간과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올해 응모작들에서 절감한 것은 인식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력이다.

예술은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므로 인식을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은 “우리 중에 누가 시스티나 천장 벽화를 바울신학에 관한 아주 박식한 한 편의 논문과 바꿀 것인가?”라고 부르짖을지 모른다. 거기에 대해선 <예술철학>의 저자 고든 그레이엄처럼 반박하면 될 것이다. “연극이 직설적인 역사로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이 셰익스피어가 영국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을 높여줄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나 철학과는 그 인식의 방법과 종류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자각하되 경쟁 자체를 마다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서사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지만 재치 있고 세련된 문장을 쓰는 일 정도라면 자신 있다, 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응모자가 적지 않다고 느꼈다. 번듯하게 시의 꼴을 갖춘 작품들에서 그런 내심이 감지될 때면 답답함이 커진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문장을 써놓고는 그 문장이 자신이 투여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맥락도 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주어와 술어를 어색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이근화나 신해욱의 좋은 시와 비슷하게 보일 거라 믿는 것일까. 소설에 비해 시가 독자를 속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행성 글쓰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인식적 가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예술가라면 세 가지 확신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인식했다는 확신, 그 인식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그 인식은 나만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인식된 것’의 실체를 논리정연하게 미리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흔히들 얘기하듯이 그런 상태는 시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음 다섯 편을 본심에 올렸다. … 그러나 이중에서 당선자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다른 심사위원이 본심에 올린 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올해는 이 사람이 당선자가 되거나 아니면 당선자가 없겠구나.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당선자를 뽑지 말자고 주장하는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입장과 취향이 다른 심사위원 네 사람을 이 시는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에게서는 시의 인식적 가치에 대한 겸허한 존중과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느껴졌다고. 도입부를 읽자마자 나는 자세를 바꿨다(비유가 아니다. 매력적인 도입부는 누워서 시를 읽는 불손한 독자의 등을 실제로 곧추세운다).

화물칸에 일렉 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이런 도입부는 분석이고 뭐고 하기 이전에 바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의미와 리듬이 서로 뒤엉켜 달려나갈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 시는 ‘A라는 상황 혹은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B나 알겠지/알까’로 정리될 구문을 반복하면서, 나쁜 상황은 오히려 그 상황이 극한에까지 이를 때(이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최대화’될 때) 돌파될 수 있다는 ‘인식’을 생산해낸다.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그러다가 아래 문장이 나온다. 자칫 시의 흐름을 깨는 결과를 낳기 쉬운 직설법의 문장들이지만, 앞부분에서 충분한 사전 작업을 해놓았기 때문에 이 부분도 독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 아찔함, 그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 견뎌본 적 있니!

인식적 가치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기에 이렇게 쓰일 수 있었겠지만, 이긴 시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도 희귀한 장점이다. 낭독 혹은 연설에 능한 이들은 어디서 쉬어야 하고 어디서 달려야 할지를 잘 안다. 당연하게도 시인은 행과 연의 길이를 조절하고 배분하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그것으로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 시인은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존재의) 리듬”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넘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버린 (시의) 리듬’을 감지할 수 있었다. 황유원씨의 등장이 기쁘다. 세상의 모든 시적인 것들을 ‘최대화’해주시길.

_ 신형철, 문학동네, 2013 가을.

May 8, 2017: 9:50 am: bluemosesErudition

마크롱의 연극 선생님이었던 브리짓 트로노는 특히 마크롱의 비범함을 높이 샀습니다. 지난해 한 다큐멘터리에서 트로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크롱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요. 10대 청소년의 감수성이 아니었죠. 이미 다른 어른들과 말도 잘 통했고, 동등한 관계를 맺었어요.” 하루는 마크롱이 선생님과 함께 마지막 연극 수업 때 무대에 올릴 극의 대본을 쓰고 싶다며 계획을 짜 왔습니다. 트로노는 마크롱이 이내 지루해지겠지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될 줄 알았죠. 그런데 같이 대본을 쓰는데, 마크롱은 정말 조금씩 깨우쳐가며 끝없이 나아지고 끝내 일을 다 해내더라고요. 정말 똑똑한 친구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죠.” 선생님이었던 트로노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하고 마크롱은 16살에 공부를 마치러 아미엥을 떠나 파리로 갔습니다. 트로노는 이 시절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매일 몇 시간씩 통화했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 결혼은 말도 안 된다던 제 반대가 누그러졌어요. 마크롱이 정말 끈질기게, 그렇지만 아주 훌륭하게 저를 설득해냈죠.” 브리짓 트로노는 마크롱보다 24살이 많습니다. 당시 결혼해 아이 셋을 둔 엄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트로노는 남편과 이혼하고 학생이었던 마크롱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2007년에 결혼합니다.

“마크롱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는 끝없이 투쟁하며 살아왔다, 쉬운 것도, 분명한 것도, 알아서 척척 되는 것도 전혀 없었다고요. 무언가를 할 때 정해진 길이 있어서 그것만 따라갔던 적은 한 번도 없고, 항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워가며 얻어냈다고요.”

“제 할아버지, 할머니 네 분은 선생님, 철도 노동자, 사회복지사, 교량 건축 기사셨어요. 저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출신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제가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던 건 교육 덕분이었습니다. 갈림길에 설 때마다 저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제가 노동자와 서민, 중산층의 후보라고 누구보다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마크롱이 실패를 추스르는 데 미숙하다는 점은 마크롱을 지지하는 이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약점입니다. 마크롱은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뼈아픈 실패나 큰 좌절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랑제꼴 중에도 최고로 꼽히는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에 떨어졌다지만, 그러고 나서 국립행정학교에 갔기에 이를 실패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슈는 그랑드 마르슈(Grande Marche, 가가호호 방문하며 유권자를 만난 앙마르슈의 대국민 인터뷰)를 통해 유권자 2만5천 명의 상세한 견해를 담아냈습니다. 앙마르슈의 자원봉사자들이 프랑스 유권자를 만날 때 꼭 하는 질문이 두 가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건 무엇이고, 반대로 잘 안 되고 있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입니다. 흥미로운 모순점도 드러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학교는 대체로 원만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답했는데, 동시에 무엇이 잘 안 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또 많은 사람이 국가 교육 제도를 꼽았어요. 일선 학교와 교육 제도를 유권자들이 다르게 인식하고 있던 것이죠. 이렇게 미묘한 사안임을 생각하면 해결책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죠.”

_ ENA 출신의 1977년생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당선(2017. 5. 7.)

April 17, 2017: 2:23 am: bluemosesErudition

슬프고 비참한 심정으로 남산 팔각정에 올랐다. 사흘하고도 두 끼를 더 굶은 뒤라 몸이 휘청거렸다. 서울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저 많은 집들 중에 내가 쉴 곳은 단 한 군데도 없구나. ‘포기하자…’ 하고 험한 생각이 드는데 송충이에 갉아 먹히고 있는 작은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 바로 그 시절이었다. 명동 쪽에서 연출하던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끔 심금을 털어놓고 “좋은 연극 만들자”며 서로 위로해주고 다짐하던 친구였다. 소식을 전한 친구와 이태원동 아픈 친구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 그 말끝에 친구가 웃으며 농담조로 “야, 지금 보신탕 한 그릇 먹으면 힘이 좀 나겠는데 말이야”라고 했으나 우리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그래, 빨리 건강을 되찾도록 해라. 그때 보신탕 놓고 소주 한잔하자”고만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놈도 우리 이해해 줄 거야. 빈털터리라는 걸”이라며 스스로 변명했다. 며칠 후,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그 날 이후 한동안 밖에 나오지 못하고 ‘보신탕 한 그릇 사주지도 못한 못난 놈이 무슨 친구라 할 수 있는가!’라며 자책했다. _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전무송, 경향신문 2012/04/22)

March 10, 2017: 1:55 pm: bluemosesErudition

4. 오늘날 사람들이 콘텍스트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무식해지곤 한다.

9. “생의 현실성에 속박되고 규정된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것의 이해를 통해서 해방된다.”(딜타이, <역사적 이성 비판 초고>)

10. 하르트만에 의하면 객관적 정신은 “정신 세계가 심리생활(Seelenleben) 상부에 형성하는 특수한 존재 영역”이다.

12. 출발점이 다른데, 사상만 떼어와서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텍스트를 보든 그 텍스트가 인간 존재의 어떤 층위에서 출발하는지를 말이다.

13. “사람의 삶은 고되다. 고됨은 여가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보자. “All of life can be divided into work and leisure, war and peace, and something done have moral worth, while others are merely necessary and useful.”(1333 a30 - 33)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인생을 일askolia과 여가skole로 나누었다. skole에서 school, schola, schule, ecole이 나왔다.

14. “It’s good for you.” 이 문장에서 good이란 단어는 매우 미묘하다.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moral thing과 necessary and useful이 동일해진다.

15. 칸트의 도덕률 성립 근거는 인간 자체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객관적 현실 없이 논의가 불가능하다.

16.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은 인생동안 여러분은 문학의 수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형태의 검열에도 홀연히 맞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오클라호마 침례파 여신도 단체에서 어떤 책이나 연극에서 사악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항의해 온다면, 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이라고 알려져 왔던 몇몇 작품들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행위에 기초해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은 심정입니다. … 이 계보도의 인물들에 의지하였던 위대한 작가들, 호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 그들은 우리들에게 길을 열어 준 작가들입니다.”

19. 그리스 철학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nihil ex nihilo)’는 것을 근본원리로 삼는다. 반드시 질료가 있어야 한다. 히브리 철학은 무에서 유를 만든다. 형이상학 자체가 다르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융합될 수 없다.

20-21.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은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대상을 취급하는 능력이다. (중략) 플라톤에 따르면, 지적으로 탁월해지려면 감각에서 떠나야 한다. 신체soma에서 벗어나 고양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간다. 이 과정을 추상화abstrahieren라고 한다.

20. 호이징가는 중세를 히스테리의 시대라 했다. 육체적 생활의 시대면서 동시에 신에 대한 고도의 사변적 논의가 전개된 시대여서 그랬을 것이다.

23. 만일 어떤 강의를 듣고 ‘이게 맞는 것 같아’ 하는 정도에서 끝내버리면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건 강의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소룡 영화 보고 교실에서 고양이 울음 소리 흉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직접 강의 내용을 써봐야 한다. 본인이 이해한 방식으로 강의를 재구성하여 선생에게 확인을 받지 않으면 강의를 들은 보람이 없다. 강의를 들었다면 관련된 책을 사서 읽고 스스로 써봐야 한다.

24-26. 인식 주관이건 인식 대상이건 모든 것을 고려해서 파악해 들어가야 한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방법론적 전체주의’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서문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전체는 자신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된 본질일 뿐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과라는 것, 그것은 종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리에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에 바로 절대적인 것의 본성은 현실적인 것, 주체 또는 자기형성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중략) “이 사람의 일생은 이러이러했다”는 식으로 묘비명epitah을 쓴다. 이는 그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의 일생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生 전체를 압축한 것으로 그 사람의 진리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생성된 진리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은 방법론적 전체주의다. 어느 한 순간의 단면만을 진리로 보는 게 아니라 그 과정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 진리이다. 어떤 대상이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 전체를 헤겔은 변증법Dialektik으로 보았다. 사람을 변증법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을 우리는 총체성Totalität이라고 부른다. 총체성은 단순한 전체Allheit와 다르다. 총체성은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이 총체성을 학문의 목적이자 방법으로 삼은 사람 중의 하나가 게오르그 루카치이다.

25-26. 서양철학의 궁극적 실재, 절대적 진리가 어떤 모습을 갖느냐에 따라 Sein의 철학이 있고 Werden의 철학이 있다. (중략) 어떤 대상이든 층위가 있는데 그 층위를 따져가면서 봐야 한다. 이는 비단 학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What are you?”, “Who are you?”를 물을 수 있다. What은 본질이므로 나나 너에게 물을 때 대답이 같을 수 있다. 그러나 Who는 호칭으로서 다를 수 있다. 즉 자신의 층위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층위에 대한 分도 존재한다. “君君臣臣父父子子”에서 君은 君의 分을 갖는다. 즉, 군자다움이다.

28.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은 반드시 사서 읽어야 할 2차 텍스트이다. “초기 그리스의 조형예술에서 인간 묘사 역시 인간의 실체적인 신체가 통일체로서가 아니라 집합체로서 파악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 고전기의 예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각 부분이 서로에게 관련을 맺고 있는 유기적이며 통일적인 신체로 묘사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호메로스적인 인간들은 후대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체를 ‘신체 자체’로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四肢의 총체로서 알고 있었던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호메로스는 거듭해서 민첩한 다리, 약동하는 무릎, 아주 건강한 팔을 몇 번이고 말하고 있는데 …”

29.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몸과 팔, 발을 따로 그렸다. 즉 이들에게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신체 개념이 없었다. 여기서 ‘몸’은 몸 전체가 아니라 토르소만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중에서도 피부만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의 그리스 언어에 근거해서 호메로스를 이해해야 한다. 이는 호메로스를 그 자체로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29. “이도메네우스가 그(알카투스)의 몸을 다년간 지켜주던 …” 여기서 호메로스는 ‘몸’을 그리스어 chrós로 썼는데 이는 ‘피부’를 뜻한다.

30-31. “사물들은 그들의 출생 연원인 그 사물들에게로, 정해진 바에 따라 소멸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며, 그들의 불의에 대해 시간의 섭리에 따라 벌금을 문다.” (중략)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세계를 보는 태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물활론物活論으로 물질이 그것 자체로 활동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질 그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적인 원리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을 이해하려면 moira, “정해진 바”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moira와 가장 비슷한 영어 단어는 element이다. element는 기초, 요소, 원소, 원리, 영역 등 여러 뜻이 있다. moira와 가장 같은 뜻이 ‘영역’이다. moira, 즉 정해진 바를 넘어서 다른 영역으로 가면 아낙시만드로스가 보기에 이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갈가메시 서사시에서 영원한 생명은 사람의 moira가 아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면 복수의 여신Nemesis이 나타난다. moira를 어긋내는 것이 불의이다. 당연히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

32-33. 분배는 그리스어로 nemein 즉, 나누어주다는 뜻이다. nemein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 nemesis이다. moira가 nemein 차원에 오면 정의Justice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에서 정의의 첫 번째 뜻은 다름 아닌 ‘제대로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리스는 왜 그리 제대로 나누는 것에 신경을 썼나? 그리스인들은 배타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약탈경제를 일삼던 자들로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뭔가 얻으면 그때그때 처와 자식에게 줘야 한다. 농사야 1년 되면 수확하지만 이들은 자기 것이 언제 생길지 모르는 상태다. 왜 서양인들이 그리 분배에 집착하는지, 뭔가를 얻을 때 조차 각자 그릇을 들고 덜어서 먹는지 이들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합리성, 합리주의에서 ratio는 라틴어로 ‘계산하다’이다.

33. 아테네 시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moira를 생각하고 이에 따라 살면 운명에 따라 살고 동시에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moira라는 ‘정해진 바’가 nomos로 바뀜에 따라 공동체, 사회철학적 의미로 변모하게 된다. 이것이 콘포드의 <종교에서 철학으로>에 나와 있다.

35. arete와 agathos라는 말은 애초에는 아직 유용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초기에는 전혀 도덕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 호메로스가 어떤 한 인간을 ‘agathos’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도덕상으로 비난할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훌륭한 군인과 우수한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처럼 유용하고 소용있고, 수완(능력)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rete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품위, 공적, 성공, 신망 등을 의미한다. “arete를 위해서 행하게 되는 경쟁의 보수는 고전시대에 이르기까지 명성과 명예였다. 공동체는 개인에게 부과되고 있는 가치를 보증한다. 따라서 명예(time)는 도덕의식의 발달에서 arete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36-37.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그리스 문명의 탄생>에 보면 영웅의 정의가 나와 있다. “영웅이란 낱말은 크레타어에서 온 것인데 … 영웅이란 자손이 정성껏 바치는 재산을 받아 무덤 너머까지 그의 권능을 행사하여 사후에도 생전에 다스리던 공동체를 보호해주는 위대한 인물을 말한다.”

37. 피타고라스가 세 가지 종류의 삶, 즉 상인, 운동선수, 관객을 나눴다.

39-40. 그리스 비극은 철저한 자기 의식에서 나온다. 박홍규 선생의 <형이상학 강의2> “플라톤과 전쟁”은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전쟁에 나선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끝까지 답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극이 나오는 것이다.

40. 고대 그리스 비극 경연대회는 나흘간 진행되었는데 모두 15편 정도였다. 혈연공동체는 신이, 시민결사체는 인간이 정한 것으로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은 후자를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로마가 가능했다. 노모스만 지킨다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식민지인에게도 시민권을 준 것이다.

41. 로마와 중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문제사적으로 중요치 않다. 철학사가 없다. 철학자가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다.

44. 우리는 당위Sollen와 현실Sein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어떻게 존재를 당위에 맞출 것인가. 칸트는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와 인간의 인식이 가능한 세계인 현상의 세계, 이 두 세계를 완전히 나누어 버렸다. 이는 흄으로 인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의 성과였다. 이렇게 해서 나온 칸트의 저작이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결코 두 세계를 매개하려 하지 않는다. 신 역시 요청할 뿐 매개하려 들지 않는다.

45-46. 서양철학의 주류는, 늘 강조하지만,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흄, 칸트, 비트겐슈타인 등이다. 즉 모두스 뽀넨스modus ponens에 충실한 이들이다. 이를테면 케니가 공저자로 참여한 <서양철학사>는 서양철학의 주류를 강조하고 힐쉬베르거의 책은 오히려 주류를 경시한다.

46. 경계를 지원버리는 야바위꾼들이 있다. 신이치도 지적했듯이 헤겔은 매개를 살리는, 혹은 경계를 지우는 철학자이다. 뚜렷한 경계를 세운 칸트와 다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물자체와 현상계가 다르다고 말한다. <실천이성비판>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모른다고 했던 물자체를 요청한다. 제3의 저서 <판단력비판>에서 양자를 매개하지 못한 것이 하르트만이 전하는 칸트의 한계였고, 이 미해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칸트의 뒤를 이은 독일 관념론자들의 문제였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지에 이른다. 칸트식으로 말해보면 감각적 확실성은 현상이고 절대적 지는 물자체이다. 핀들레이는 “헤겔의 철학은 그 체계 안에서 보면 모두 진리이다.” 물론 그 체계를 벗어나면 모두 거짓으로 보인다고 돗붙인다. 헤겔은 <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등에서 매개를 통해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헤겔은 낭만주의자다.

47. 움베르토 에코의 <해석의 한계>를 보자. 헤르메스주의는 2세기경 헬레니즘 세계를 뒤엎었던 사상으로 로마의 모두스 뽀넨스에 대비된다. 모두스 뽀넨스로서의 로마 對 헤르메르로서의 헬레니즘 세계라는 구조가 여기서 나온다.

48. 모두스 뽀넨스에는 시간적 선후가 있고 합리적 분별이 있다. 이것이 없다면 논리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들은 동일률과 모순율에 입각하여 사유한다. 반면에 헤르메스주의는 시간과 역사를 향하여 거부의 신드롬을 궁리한다.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를 독일 낭만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정립한 자가 바로 헤겔이다.

48.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것으로써 ‘과학적’이라는 방법과 ‘사회주의’라는 목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아이덴티티를 규정한 것이다. 푸르동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의 차이점은 ‘사회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에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푸르동이 목표는 같지만 조야하다(crude)고 평한다.

49.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수용했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헤겔의 철학이 신비주의적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헤겔의 변증법은 원인과 결과가 구별되지 않는다. 헤르메스적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배제하여 역사적 방법(발생적-구조적)을 제시하였다. 헤겔은 방법론적 전체주의에서 시간을 일직선으로 놓지 않고 원으로 만들어 버렸으나 마르크스는 원을 직선으로 펴낸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전도되어 있다는 신비주의를 배제하고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수용한 것이 마르크스의 학적 방법론이다. 분명히 경계 세우기를 하는 모두스의 입장에 선 것이다.

50. 월쉬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사회과학자들을 위한 학문적 지침을 만든 것이다. 경계 지우기를 사용하면서 마르크스로 돌아가면 프루동처럼 조야한 사회주의자가 된다.

51-52. 다빈치는 방식Manner과 양식Stil을 구별해서 썼다. 전자는 우연적 개인적 성향이요, 후자는 새로운 예술적 형식과 방법론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그래서 천재는 사태의 본질에 관여하여 이를 개념적으로 파악해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한다. Stil 안에는 지적 파악을 구현하는 방법까지 들어간다. 르네상스적 천재는 Stil을 만들어낸 이들이요, 낭만주의적 천재는 그저 Manner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52-53.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설명을 비교해보자. 먼저 책과 세계. “그가 살아간 시대는 중세의 풍요가 넘치고 그리스의 철학이 유럽으로 들어와 활발하게 연구된 다음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당시에 재발견된 플라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헬레니즘, 아랍철학 및 이교사상 등을 기독교 중심으로 종합하고 재정리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의 사상은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소화해낸 새로운 종합이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바탕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수용하되, 둘을 체계적으로 조화시킨 것이다.” 다음은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 1권에 있는 내용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살았다. 이미 중세적 사고방식은 해체되고 있었고, 교회는 점차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상대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토마스의 해결책은 ‘이성’과 ‘계시’를 아예 분리하여,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양자를 교차하지 않는 두 개의 동그라미로 나누어 버리는 거다.” 진중권의 언급은 문헌적 팩트에 근거한 말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살았다”는 거짓말이다. 그는 중세의 절정에 살았다. “이미 중세적 사고방식은 해체되고” 있지 않았다. 자연과학도 없었다. 당시 교회의 적은 이단운동이었다.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설립되었고 여기서 학자, 이단심판관이 다수 배출되었다. “토마스의 해결책은 이성과 계시를 아예 분리”한 것이 아니라 양자를 종합하는 것이었다. 학적으로 그는 결코 양자를 분리하지 않았다. 진중권의 이런 구절들은 정확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막연히 이해한 대로 쓴 것일 뿐이다. 어쨌든 이는 지적 사이이며 한국 지식인 태반이 저지르는 작태이다.

54. 근대 자본주의는 로마시대, 마키아벨리의 세속성, 서구 저변에 놓인 약탈적 시스템, 다윈의 진화론, 홉스의 국가론, 데카르트 및 뉴턴의 기계론 등이 결합된 것으로 여간 단단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강력한 체제가 없었다. 욕망에 호소하여 흡인력이 강하다.

January 13, 2017: 1:28 pm: bluemosesErudition

“그렇겠죠.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배우가 되고,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 그건 즉발적인 건데, 모든 종류의 작품은 …… 그렇죠.”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역사에 대해 순간적으로 감흥을 얻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만드는 거거든요. 성찰의 기회를 짧은 시간에 얻는 거예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이. 반면에 개인의 존재에 대해 사고하는 방법, 타인과 사물, 사건을 분석하는 방법,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 그걸로 가치관, 세계관을 갖도록 만드는 거라면 그건, 교육이죠.” “예,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얻어낼 수 있는 거고, 그건 단계가 있는 거구, 그 효과를 확인하면서 실행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술 작품은 그보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경험이죠. 순간이에요. 어떻게 보면 음악이나 연극처럼 시간에 구애받는 예술은 훨씬 즉발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 강력한 뭔가가 필요한 거겠죠. 감흥! 예, 그런 걸 거예요. 맞아요, 감흥. 그게 없다면 …… 별 것도 아닌 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특별한 감흥이 필요한 거예요. 아마도 다른 장르보다 더, 꾸미거나 덧칠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예, 그렇겠죠, 아마도. 알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 그게 아니면, 그게 결여되어 있다면 사람들을 어떤 단계까지 끌어올릴 수 없을 거예요. 서술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렇죠. 감흥! 헌데 사람들은 예술가의 감흥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감흥에 대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 만드는 쪽에서, 만드는 사람들이 그걸 잘못 이해하면 순간적인 감흥으로, 즉발적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그런 것이 창작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건 명백한 오해죠. 즉발적으로 감흥을 받는 건, 수용자죠, 받아들이는 쪽이에요. 만드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발상 따위의 말을 믿는다면 그건 순진한 거예요.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겪은 후겠죠. 그럴 거예요.” “물론 예술가에게도 감흥은 중요해요. 예술가도 자기 작품에서 벗어나면 수용자니까.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 통찰력, 그리고 의지, 소통하려는 의지죠,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시력! 제시력이에요.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예술가인 거죠. 예, 때때로 우린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모두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요. 소통하려는 의지, 강렬한 욕구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런 의지가 조건이라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많을 거예요. 결국, 예술적인 방법으로 …… 제시할 수 있어야죠. 그래요, 예술은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죠. 이 제시의 패턴이 고유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걸로 우리는 어떤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평가를 내려요. 그걸로 …… 그러니까 매듭이 지어지는 거죠, 통찰력과 의지가. 제시력으로.”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 “어떻게 내놓을 것인가 ……” “어떻게 자기 자신을 ……”

_ 송선호, <어떤 동산>,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