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1, 2018: 2:37 pm: bluemosesErudition

17개 시도 교육청

August 20, 2018: 2:49 pm: bluemosesErudition

“1에서 1%를 더하면 1.01이고 1%를 빼면 0.99이다. 1.01과 0.99는 겨우 0.02차이다. 그러나 1.01을 365제곱하면 37.8이, 0.99를 365 제곱하면 0.026이 된다. 0.02라는 미미한 차이가 37.8(1453배)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하루에 해야 할 목표를 누군가는 1.01만큼 달성하고 누군가는 0.99만큼 달성했다고 생각해보자. 하루만 보면 별 차이 없지만, 1년이 지나면 절대 극복 불가능한 간극이 생긴다.” _ 김용섭, <실력보다 안목이다>

: 11:23 am: bluemosesErudition

도쿠시마, 가가와, 에히메, 고치 등 4개 현이 포함된 섬, 시코쿠. 시코쿠의 “오헨로를 걷는 순례자를 ‘오헨로상(お遍路さん)’이라 부른다.”

: 2:32 am: bluemosesErudition

6. 마르크스의 인간소외에 대한 이론은 ‘인간’에 대한 나의 인식을 일보 전진시켜 주었다. <사람아 아, 사람아!>를 집필하고 있을 때 나는 마침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문예이론 선독>이란 과목의 강의 노트를 만들고 있었다. 이 강의 노트를 작성하기 위하여 마르크스, 레닌 저작을 다시 읽었으며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었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반복하여 읽으면서 상세한 노트를 만들었다. 그때 ‘인간소외’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나의 머리에 들어왔으며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계시와 정열은 <사람아 아, 사람아!>와 그 후기에서 충분히 밝혔다. 그 이후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을 분석하고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창작에 있어서의 자각적 추구로 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나의 관점은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그러한 공격이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하였다. 나는 여기서 나의 비판자들에 대하여 ‘자기정신을 정시하기 바란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다.

7. <사람아 아, 사람아!>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문화혁명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다기보다는 그러한 역사적 격동이 인간과 인간 관계에 어떠한 충격을 주었으며 또 인간과 인간 관계는 이러한 격동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략) ‘혁명의 격정만을 이야기하고 혁명의 서정을 말하지 않는 것은 편향’이라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129.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을 잘 읽어 보라구.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에 두 위인의 마음속에는 ‘인간’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씌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의 이론, 그의 실천은 모두 이 ‘인간’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 인간을 ‘인간’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모든 현상과 그 원인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 중에는 그 수단만을 기억하고 그 목적은 망각하거나 간과해 버리는 자도 있지. 마치 혁명의 목적이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가정을 파괴하며 사람들을 갖가지 울타리로 서로 격리시키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야.

237. 그때는 프롤레타리아의 감정이 있으면 대변의 냄새가 향기롭게 여겨진다는 말을 정말로 믿었었어. 나는 훈련과 사상 개조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지. 하지만 사실은 구토증이 나서 분뇨통에서 우글거리는 구더기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 어떤 아이가 ‘쑨위에, 구더기가 네 밥그릇으로 들어갔어.’ 하고 말했을 때는 본능적으로 뛰어 일어나 밥그릇을 내동댕이쳐 버렸지. 친구들이 와 하고 웃었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어. 그리고 나서 나는 자신의 본능을 이겨 내자고 결심하고서 분뇨통 가장자리에 앉았지. 분뇨통을 응시하면서 손으로는 열심히 밥을 날랐어. 하지만 마음은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무튼 한 그릇을 다 먹었고 나는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었어.

470. 20년 전 나는 상하이의 화둥(華東) 사범대학을 앞당겨 졸업하고 풍파 심하고 고난으로 가득 찬 문예계에 발길을 내딛었다. 돌이켜 보면 맹종과 무지가 힘이 되고 자신감을 부여해 주었던 시절이었다. 스스로는 이미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본 원리를 통달하고 사회에 대해서나 인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연단에 서서 지도자의 의도에 따라 작성된 원고를 소리 높여 읽었고 나의 선생님이 주창했던 휴머니즘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더 좋아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473. 나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을 모두 독파하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읽은 한정된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에 대해서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은 서로 통하거나 또는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경전적 저작 속에서 이론적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외침을 억제하려는 생각은 없다. 비판해야 한다면 비판하라. 이것은 어차피 나 자신의 사상, 감정이며 또한 스스로 추구한 자기표현일 따름이다. 허물은 나의 것이며 어떠한 벌을 받더라도 유감은 없다.

_ 다이허우잉, 신영복(역), <사람아 아, 사람아!>, 다섯수레, 2005.

: 12:51 am: bluemosesErudition

“공자가 민간에 떠돌던 시 삼천여 편 가운데 음란하지 않고 백성들의 교화에 바람직한 것들로만 삼백 다섯 수를 골라 채시采詩한 결과라고 한다. ‘풍風’은 각 제후국의 민간에 떠돌던 민가이고, ‘아雅’는 조정의 음악이며, ‘송頌’은 선조들의 덕을 기리는 가공송덕歌功頌德의 노래들이다.”

_ 옌렌커(閻連科)의 <풍아송> 번역본을 문학동네에서 2014년 펴냈다. 그리고 나는 참을성 있게 훑어보고 바로 덮었다.

August 19, 2018: 11:54 pm: bluemosesErudition

요한복음 15장 2절. “Every branch in me that does not bear fruit he takes away, and every branch that does bear fruit he prunes, that it may bear more fruit.”

위 문장의 “takes away”에 해당하는 헬라어(ἀείρω)는,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윌킨스와 콥은 <포도나무의 비밀>에서 ‘제거한다’를 ‘들어올린다’로 고치고 “나의 안에 거하라”의 본뜻을 조명한다.

: 6:32 pm: bluemosesErudition

“모래놀이치료요법은 스위스의 도라 카르프에 의해서 창시된 심리요법입니다. 환자에게 모래상자 속에서 여러 가지 미니어처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게 하는데, 그런 표현 활동을 통해서 자기 치유력이 작용하여 치유가 됩니다. 1965년에 내가 일본에 소개한 이래 다른 나라보다 일본에서 특히 발전했고, 나는 카르프 여사의 뒤를 이어서 제2기 국제 모래놀이치료요법학회의 회장을 맡았습니다. 모래놀이치료요법을 지도하기 위해 해외에 나가는 일이 많습니다.”(가와이 하야오)

: 2:44 am: bluemosesErudition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대답만 해서 미안합니다만, 따분하고 재미없는 질문에는 그런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죠.”

: 2:39 am: bluemosesErudition

41.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담갔다 건지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문장을 만들면 울림이 얕아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 이야기, 하는 건 요컨대 재료를 담갔다가 건지는 작업입니다. 깊이 담글수록 나중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달라지죠.

117. 다시 한번 확인해두자면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非리얼리즘이죠. 그런 분리가 처음부터 떡하니 전제되어 있어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제 목적이니까요.

_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문학동네, 2018.

August 18, 2018: 3:47 pm: bluemosesErudition

21. 물론 PTSD는 일본에도 어느 정도는 있는 일이지만, 일본인들은 충격을 개인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전체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족 간에 투덜투덜 말다툼을 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중 누군가가 뚜렷하게 신경증적인 증상을 보이는 경우는 적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다소 좋게 생각했지만, 곧 플러스 마이너스의 양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충격을 혼자서 받아들이고 고민할 힘이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22. 갑자기 나쁜 짓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등 증상이라도 보이면 판단이 설 텐데, 왠지 모르게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지요. 이럴 경우에는 증상을 형성하는 힘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 나름대로 처리하려다가 실패하기 때문에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상처를 혼자 힘으로 처리하지 않고 모두에게 나눠주기 때문에, 상대방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서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23~24. 책임에도 개인의 책임과 집단의 책임이 있잖습니까? 일본의 경우는 집단의 책임이라고 할까, 지역에 따른 책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고베에서 지진일 일어났을 때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고베 전체의 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기 때문에 정면으로 받아들입니다. … 일본의 경우는 울면서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한가” 하고 불평만 늘어놓을 뿐입니다. 결국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정도는 좀처럼 되지 않습니다. 불행의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고 여기니까요. “내 불행을 어떻게든 해결해 주세요”라는 식이기 때문에 잘 치유되지 않는 겁니다.

27~28. 모든 것을 분석해서 언어화해야만 치유할 수 있다는 이론에는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언어로 분석하는 방법은 자칫 잘못하면 상처를 더 깊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일례로 “목구멍에 뭔가가 끼여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큰맘 먹고 말해 보세요”라고 했더니 “사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상처를 입게 됩니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그런 때 모래놀이치료요법을 이용하면, 그런 과정이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완전히 분석하려고 하는 것과 언어화하지 않고도 치유하는 것, 그 중간 지점에 모래놀이치료요법이 있는 것입니다.

29.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3년 동안이나 말하지 않고 버팀으로써 마침내 치유된 사람도 있습니다.

36~37. 무라카미 씨의 <소설가가 되어서>에서 한 말 중에 “반항을 하고 싶어도 반항할 만한 것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나의 젊은 시절, 그리고 무라카미 씨의 젊은 시절에는 젊은이들이 비교적 쉽게 ‘반항할’ 상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체제’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반체제’의 형태를 취하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체제’나 ‘반체제’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며, 최근에는 ‘반체제’ 운동에 커미트해 봐야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본래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체제’를 분명히 규정하고 그 반대의 ‘반체제’를 생각하는 방식은 ‘체제’ 속에 본질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의 커미트먼트는 표면적으로 아무리 격렬해도 깊이가 없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결국 약해집니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의 본보기로서 무라카미 씨가 해온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체제에 반대하는 반항이 아니라,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든 길을 개척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문학 스타일, 생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도식적으로 생각한 반항에 대한 커미트먼트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져 쉽게 식는 데 반해,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모두 바쳐 커미트먼트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작품’이란 예술 작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 자체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44. 번역을 하다 보면, 때때로 자신이 투명 인간이 되어 문장이라는 회로를 통해 타인(즉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속이나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집 안으로 살그머니 걸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는 글을 통해서 남과 그런 관계를 갖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어떤 텍스트에 대해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특별한 관련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47~48. 한국은 일본에 비해서 너무 급속하게 서양화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굉장히 이기주의적으로 변했다고 어떤 한국인이 그러더군요. 개인주의가 몹시 심해서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려 한다는 겁니다. 반면 일본인은 서양화되면서도 의외로 전체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인은 그런 점을 보고 배워야 한다면서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가족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말하자면 ‘패밀리 에고’를 갖고 있잖습니까? 그것은 개인과 개인이 관계와 그 위험성을 늘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온 서양의 개인주의와는 다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패밀리 에고 밖으로 나오면 그때는 정말로 에고이즘이 되기 때문에 개인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일본인의 경우에는 패밀리 에고와는 또 다른 ‘필드 아이덴티티’, 즉 자신이 있는 곳을 동일성의 기초로 만드는 매우 재미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활동영역으로 삼거나 가정을 활동영역으로 삼아 각각 능률적으로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 중에서 참다운 의미의 개인주의에 눈뜬 사람은 가족으로부터 디태치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기폭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무라카미 씨의 소설에서 디태치적인 면을 읽고 감동하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닐까요.

52. 어느 정도나 교활한다, 교활하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는 없는가를 좀 더 연구해서 세련된 교활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인은 자신들의 교활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교활한 짓을 하니까 비난을 받으면 방어하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53. 나는 “모순을 허용해 주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에 의해서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모순을 계속 끌어안고 있되 서둘러 답을 내려하지 않고, 실제적인 해결책을 찾기는 하지만 그 모순에는 계속 관심을 갖는 겁니다. 모순의 존재나 그 본연의 상태, 해소 방법 등에 대해서 생각하고 언어화해 나갑니다. 그러나 결코 서둘러 해결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처음에는 모슨으로 받아들이던 현상이 다른 원근법이나 다른 차원 속에서 모순을 갖지 않은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그것을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55. [하야오]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든가, 통합성 같은 것은 이제 그다지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균형은 문제로 삼지만 … 요즘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하루키] 지금의 저에게 그것은 소설,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저는 소설에서 균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통합성은 필요 없으며 정합성과 순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57. 소설을 쓰는 행위는, 여기서 말한 것처럼, 자기 치료적인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메시지가 있어서 그것을 소설로 쓴다”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제 속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그런 메시지가 어둠 속에서 문득 떠오릅니다 - 대개의 경우 알 수 없는 암호로 쓰여 있지만요.

59~60. <태엽 감는 새>는 제3단계입니다. 우선 아포리즘과 디태치먼트의 단계, 다음에는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 그것들을 거치고 나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커미트먼트라는 것이 관련되겠지요. … 커미트먼트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한 것 같은 “당신이 말하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러니 손을 잡자”라는 식이 아니라, ‘우물’을 파고 파고 또 파 내려가 그 밑바닥에서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벽을 넘어서 이어지는 그런 식의 커미트먼트에 저는 무척 끌렸습니다.

64~65. <태엽 감는 새>는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는 유형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이 저 자신보다 앞질러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지금 저는 저 자신이 그 이미지를 뒤쫓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74~75. 미국인의 경우는, 자신들의 관계가 어딘가 진짜가 아니라는 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 그래서 언제나 의식적으로 다정하게 지내려는 거지요. 의식적으로 항상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확인이 안 될 때는 미련 없이 헤어집니다. (중략) 서양의 경우는 ‘로맨틱 러브’가 기본이 되고 있지요. 그런데 로맨틱 러브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만일 로맨틱 러브를 오래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성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적 관계를 가지면서 로맨틱 러브를 오래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요. 부부 관계를 지속해 나가려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83. [하루키] 벽을 통과하는 ‘가베누케’ 같은 것도 힘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기합을 넣을 때도 그렇고, 아무튼 자신이 지면 벽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힘이 필요합니다. (중략) [가야오] 정말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가베누케 같은 것을 머리로 지어내는 겁니다. 그건 안됩니다. 나는 그런 것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지어낸 이야기’에는 몸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머리만으로 만든 것이지요. 독자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85~86. [가야오] 병이 있는 사람은 박력이 있어요. …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병든 사람에게 모래정원을 만들라고 해도 두려움을 느끼는 환자는 모래정원을 만들지 않습니다. (중략) 그런데 보통 사람이 모래정원에 꾸며놓은 물건은 정말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정상인’은 시시한 것, 일탈하지 않은 물건을 꾸며놓는 재능을 갖고 있는 거죠. [하루키] 말하자면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일종의 그런 재능이겠군요. [하야오] 재능입니다.

87. 여기서 말하는 ‘대단한 모래정원’이란, 그것을 보았을 때 받는 강한 충격, 뜻밖의 표현, 모래정원을 계열적으로 보았을 때의 전개의 의외성, 미적인 감동 등을 말합니다.

88. 표현할 만한 힘이 없으면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병들어 있는 사람이라도 피로나 두려움 같은 것만 나타날 뿐 좀처럼 이야기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략) 표현이라는 형태의 힘을 가져야만 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예술가는 시대의 병이나 문화의 병을 떠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92~93. [하루키] 제가 <태엽 감는 새>에 대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저 자신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써온 어떤 소설보다도 더 알 수가 없습니다. … 이번에는 저도 뭐가 뭐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모르겠는 겁니다. 그것이 제게는 커다란 문제였고, 그런 만큼 에너지를 소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야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런 면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재미없지 않을까요? 작가가 전부 알고 만드는 것은 예술이 아니지요. 추리소설 같은 것은 앞뒤가 맞게 장치가 되어 있지만, 예술 작품에는 작가가 모르는 것이 가득 들어 있는 게 당연합니다. … 작가가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군요. 그런 바보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중략) 작품은 작가를 뛰어넘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101. 내 일은 우연을 기다리는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우연을 기다릴 힘이 없기 때문에, 뭔가 필연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려 하다가 실패하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 치료한다든가 하지 않고, 계속 우연을 기다립니다.

122~124. 얼마 전에 매우 기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몽골 군인의 안내로 옛날의 노몬한 전쟁 유적지에 갔었어요. 그곳은 사막 한가운데였는데, 찾아간 사람이 거의 없어서 옛날 전쟁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탱크, 포탄, 밥통과 물통 같은 것들이 정말로 방금 전에 전투가 막 끝난 것처럼 그대로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기가 건조해서 거의 녹이 슬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가져와서 고철로 사용하려고 해도 너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도 담아 박격포탄의 파편과 총탄을 주워 왔습니다. 장장 반나절이나 걸려서 도시로 돌아와 호텔 방에 그것을 놓아두었는데, 왠지 으스스했습니다. 너무나 실감났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깼는데, 방 안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잠이 싹 달아났습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방 안이 덜컹덜컹 흔들려서 처음에는 지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어둠 속을 기어가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니까 갑자기 조용해지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25. 다니카와 슌타로 씨도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당연한 일이지요. 당신을 시를 쓰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127. 꿈이 아니더라도, ‘아, 이 사람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믿을 만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느낌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근거가 없으니까 입 밖에 내지 않고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문득 생각날 때마다 “OO 씨, 내일은 기차를 타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고 말하면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믿을 만한 느낌을 스스로 점점 익혀나가면 그 확률이 상당히 높아질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살던 시대였다면 모두들 그렇게 했을 겁니다.

131. 공동체를 만들어서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은 그야말로 폭력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서양의 나라들은 폭력을 규칙 속에 도입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공정한 전쟁이라면 해도 좋다고 생각한 거죠. 각종 스포츠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132. 일본의 경우 특히 불행한 점은, 큰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 급진적으로 폭력을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가 소중하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병정놀이나 칼싸움까지 전부 금지했습니다. 즉 일본의 아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폭력성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갑자기 난폭해집니다. 뭔가 난폭한 짓이 하고 싶어져서, 이지메를 하기도 합니다. 이지메는 옛날부터 있었으니까 이지메 자체는 그다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전 역사에 걸쳐서 있어온 일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상대를 죽일 정도까지 이지메를 하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_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이 하야오(1996),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문학사상사, 2004.

Next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