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야만상태에 빠지는가.” “아도르노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라는 테제와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 간다’라는 테제를 결합함으로써 자연지배의 논리와 문명의 논리를 동일하게 파악한다.”
2. “아도르노는 고통(Leide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관통해 보고자 한다. … 아도르노는 고통의 원역사를 재구성하는 주도개념을 자연지배에서 찾는다. 아도르노에게 인간의 역사는 자연지배의 역사인 동시에 자연지배의 논리를 인간의 전 영역에 구현함으로써 보편적 고통의 경험을 감당하는 역사다.” … “그렇다면 내적 자연의 지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외적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이 합리적 사고와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의 내적 욕구와 욕망에 대한 억제와 통제를 의미한다.”
3. “<역사와 계급의식>의 독해를 통해 아도르노는 사물화 문제를 자본주의의 핵심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모든 관계가 교환법칙에 따라 매개되고 … 사회적 총체성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 개인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떠한 자기보존(Selbsthaltung)도 할 수 없다. 노동 분업에 의해 전일화된 사회적 지배에서 벗어날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다시 말해,] 사회의 억압적 성격으로 인해 ‘자기 주도적 독립성을 허용하는 사회적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 아도르노가 제안하는 비동일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 비동일성은 동일성을 지양하거나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존재에게 동일성 사고는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도르노는 “사고한다는 것은 동일화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의 주장을 수용한다. 이는 사유에 있어 동일성 계기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불가피한 동일성의 논리적 강압을 분쇄하기 위해서 동일성의 관점에서 비동일성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동일성의 관점에서 동일성을” 고찰해야 한다. … “아도르노가 비동일성을 제안한 이유는 결국 동일성의 논리적 강압을 해체하면서 개별적인 것, 다양한 것의 공간을 열어주고 화해를 요구하기 위함이다. … 이 비동일성에 대한 일관된 의식이 바로 동일성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인 동시에 동일성을 꿰뚫고 비동일성이 존재한다는 의식의 활동으로서 부정변증법의 작동방식이다.”
5. “아도르노에게 부정변증법은 ‘개념을 비동일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사고모델이다. … 부정변증법적 사고모델은 대상을 인식할 때 개념의 운동인 동일성을 따르지 않고 대상을 구도(Konstellation) 속에서 파악하려는 대상 인식의 과정, 사고의 과정을 말한다. 대상 그 자체를 파악하려면 구도의 관계를 읽어내야만 ‘대상 자체의 특별한 것’을 읽어낼 수 있다.”
6. “아도르노에게 고통은 비논증적 형식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예술의 중요성이 여기서 부각된다. … 예술은 그 자신의 현실 부정성과 고통스런 현실을 동일시함으로써 구체적이고 체험적으로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술은 비개념적으로 고통을 드러내는 언어다. … 아도르노가 ‘예술작품을 무의식적 역사서술’이라고 말하는 것도, 예술이 지닌 고통의 비개념적 표현을 함축한다.” … “아도르노의 관점은 루카치식의 당파성을 강조하는 예술이론, 사실주의 예술, 브레히트의 문학작품, 한스 아이슬러의 민중선전가요 등이 사회적 진리내용을 작품 내재적으로 충실히 형상화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예술의 실천적 영향력은 구호와 웅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사물화할 수 없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실천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7. “동일성 사고가 인식대상에 대한 인식주관의 지배계기를 함축한다면 미메시스적 태도는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친화관계, 화해의 계기를 함축한다.” … “미메시스는 자연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동일성 사고의 반대개념이며 … 양화된 외적 자연과 억압된 내적 자연을 기억해 내고, 주객 분리 이전의 인간이 자연을 경험하는 태도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이다. … 이 점에서 미메시스는 대상의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적 성격, 수단이 아닌 목적적 성격을 실천하는 인식적 태도다.” … “아도르노가 말하는 미메시는 신비한 어떤 것, 혹은 이성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에게 미메시는 개념적 사고 자체의 한 계기로 ’합리성을 비판하는 합리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합리성을 비판하는 합리성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닌 미메시스적 표현을 통한 합리성의 표현, 즉 미메시스적[대상을 물화하지 않고, 사태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합리성을 의미한다.”
* 아도르노는 [’야만상태’를 초래한] 물화의 근원을 자연지배에서 연유한 동일성 사고로 파악하여, 동일성 속 비동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미메시스적 태도를 제안한다. 그리고 ‘고통’을 ’화해’로 전환시킬 계기이자 단초로서 예술[작품]을 거론한다. 그러나 야우스가 비판한 바대로 “예술경험이 수용자의 이해, 해석, 비판, 평가라는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아도르노의 작품미학은 [’근대문학의 종언’과 같은 탈예술화는 차치물론하더라도] 예술의 자율성이 쌓은 성벽으로 인해 대중의 의식변화라는 실효성을 상실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