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블릿 PC와 트리플 모니터
“우리는 고래정치학교의 취지를 자유주의 운동에 포위된 시민들(시민의 정체성은 분명하나 노동자로서 정체성은 약한)과 노동 현장 활동가 사이의 가교를 만드는 것이라 정리한 바 있다. 1기는 매우 의미 있는 성과도 있었지만 대개의 인문/사회 강좌 프로그램처럼 지적 자극을 좇거나 독서 취향의 변화에 머무는 모습도 있었다. 2기 강사진은 현장 활동가를 좀 더 보강하는 게 좋다고 본다. 단, 환기할 건 ‘현장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다. 고전적인 현장, 즉 공장 노동자를 둘러싼, 혹은 투쟁 상황을 기반으로 하는 현장만 현장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그런 관점은 현장을 협소화하고 대상화함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은 현장에 있지 않다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노동하는 곳 역시 현장이라는 사실을 잊게 함으로써 결국 실재하는 현장 대부분이 은폐되는 것이다. … 대기업 정규직인,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종종 말한다. ‘내가 지향하는 이념과 내가 일하는 곳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요.’ 현장을 지향하는 데 자신은 현장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 그들이 고래정치학교에서 처음으로 현장 활동가를 조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현장을, 자신이 현장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싸우지 않는다면 전장은 망실된다.
“지난 역사 속의 급진성이나 다른 사회의 급진성을 옹호하기는 쉽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현실 속의 급진성을 옹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체제는 역사 속의 급진성과 다른 사회의 급진성이 현실 속의 급진성이 되는 걸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은 박제된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에 사로잡힌, 동시에 진보연/좌파연 하려는 치기에 사로잡힌 인텔리들과 결합하여 ‘이념의 에누리’ 현상을 만들어낸다. 일제 시절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상찬하는 역사학자가 유시민을 상찬하고, 미국의 급진주의자를 상찬하는 사람이 진중권을 상찬하는 것이다. 현실 속의 급진성은 그렇게 역사 속의 급진성이나 다른 사회의 급진성을 상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공격되고 배제된다. 체제로선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이념 정화시스템’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의식과 살아있는 현실의식이 없을 때, 우리의 역사적 지식과 외국이론에 대한 지식은 그 양만큼 강력한 사회적 흉기가 된다.”(김규항)
* 시류를 타는 안위가 아니라 별을 향하는 열망이어야 한다.
“영성이란 나와 사회와 우주만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유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회변화에 대해 말하자면, 사회변화가 나를 결정하는 것도 내 변화가 사회변화를 결정하는 것도 아닌, 사회변화와 나의 변화와 하나인 것이다. 예수전에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문제는 영성을 도외시한 혁명도, 혁명을 도외시한 영성도 아닌, 혁명과 영성의 자리를 수다와 짜증이 대체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세상도 심리적 평온도 얻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김규항)
Psalm 119:50 NIV
My comfort in my suffering is this: Your promise preserves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