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중에 미국 국방연구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코넌트는 전후 하버드의 교육 개혁을 주도했는데, 개혁의 핵심은 인문학 · 사회학 · 경영학과 같은 비(非)자연과학 전공 대학생에게 자연과학의 ‘전략과 전술’ 즉 과학의 핵심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원폭 개발 이후 미국의 미래가 이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코넌트는 과학사 중심의 교재를 편집하려 했고, 특히 화학을 전공한 자신이 제대로 다루기 힘든 물리학을 쿤이 맡아 주길 원했다. 쿤은 뉴턴의 역학이 과학을 모르는 대학생들에게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고 갈릴레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갈릴레오와 갈릴레오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리학의 차이를 분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s)』을 읽기 시작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지성사학자 쿠아레(Alexandre Koyré)의 『갈릴레오 연구(Études galiléennes)』를 탐독했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문에는 바로 이 시기에 쿤이 한 가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계시’와도 같은 통찰력을 얻은 경험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쿤을 당혹스럽게 했던 문제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 같은 분야에서는 지금 관점으로 보아도 꽤나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학, 특히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멍청해 보이는’ 설명에 만족했다는 것이었다. 물체의 운동 속도가 물체의 무게나 힘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은 갈릴레오와 뉴턴에 의해서 완성된 고전물리학을 배운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make sense)’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던 중에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은 물체의 거리 이동만이 아닌 물체의 상태의 일반적 변화를 의미했고, 따라서 이것이 운동 자체를 물체의 상태로 간주한 갈릴레오의 근대적 운동 개념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운동 개념을 당시의 맥락에서 파악하고 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17세기 갈릴레오의 물리학 사이에는 진화적 발전이나 오류의 교정이 아니라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이나 개념적 틀의 변혁이 존재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1948년 여름에 쿤을 찾아온 깨달음은 과학의 발전이란 누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1948년부터 1962년까지는 쿤이 역사학자로서 입지를 서서히 굳히면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정리하던 시기였다. 당시 쿤의 연구는 주로 철학이 아닌 역사에 집중되었지만, 그 이유는 그가 역사를 충분히 알고 난 다음에, 즉 충분히 ‘성숙한’ 다음에 철학적인 주장을 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가을 쿤은 코넌트의 추천으로 하버드 대학교 펠로 협회(Society of Fellows)의 주니어 펠로(Junior Fellow)로 임명되었으며, 여기서 받는 지원금 덕분에 다른 직장에 들어가지 않고 3년간 독서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동안 쿤은 17세기 청교도주의와 실험과학에 대한 로버트 머튼의 논문을 읽고, 장 피아제의 발달심리학을 공부했으며, 협회의 시니어 펠로였던 콰인(W. Quine)의 유명한 논문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1951)를 읽었다. 그는 또 역사학자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와 쿠아레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과거의 과학적 사건을 현재의 관심이 아니라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고, 과학의 발전이 급격한 변혁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었다. 1950년에 쿤은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해서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메리 헤시(Mary Hesse)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1950~1951년에는 세 편의 물리학, 수학 논문을 출판했으며, 1950년부터 내시(Leonard Nash)와 코넌트의 강의를 물려받아서 교양 과학을 가르쳤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역학의 발전’이라는 과목을 만들어서 강의하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버클리 대학교도 학생들에게 과학의 방법론, 특히 과학적 발견의 방법론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많았다. 특히 당시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이 발사된 뒤에 미국 정부와 대학은 과학적 발견을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을 교육해서 창의적인 과학자들을 키워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버클리 대학교가 쿤을 고용한 것도 부분적으로 이런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쿤은 버클리의 대학원생들에게 물리학 원전들을 읽는 세미나 수업을 진행하면서 오랫동안 구상하던 『과학혁명의 구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버클리와 스탠퍼드의 세미나에서 영감을 얻어 정상과학의 본질이 퍼즐 풀이(puzzle solving)라는 인식을 얻었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과학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찾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후 쿤의 집필은 빨라졌고, 『과학혁명의 구조』는 1962년에 ‘통일된 과학의 국제 백과사전’의 시리즈와 시카고 대학교 출판부에서 독립적으로 출판되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채택될 경우에 과학자들은 기존의 현상을 새로운 언어로 기술하고,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새로운 데이터를 내놓는다. 또 과거에 다루어진 모든 문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이 중에서 잊히는 것이 생긴다. 과거에는 익숙한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것이 되고, 과거에는 중요했던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쿤은 라부아지에(A. L. Lavoisier)에 의한 화학 혁명 이후 화학자들이 물질의 성질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고, 그 관심이 다시 회복되는 데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고, 또 존재한다고 해도 알 수 없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쿤은 과학철학 분야에서의 이런 비판을 수용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서 공약불가능성을 두 패러다임의 언어가 일대일로 번역될 수 없다는 ‘번역불가능성’으로 해석했다. 번역불가능성은 다른 두 패러다임이 자연 종(natural kinds)을 분류하는 서로 다른 분류 체계(taxonomic system)를 가지고 있는 데에서 연유했다. 쿤은 점차 과학철학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이 아니라 과학 이론 사이의 번역불가능성을 규명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정교화 과정에서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 즉 과거의 성취와 미래의 기대를 합리적으로 비교하기 힘들다는 통찰은 서서히 잊혔다.”

“쿤은 영국에서 발전한 과학사회학이 자신의 주장에서 벗어났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이 자신의 핵심 주장을 왜곡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언급들을 종합해 보면, 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지식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을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의 일환으로 생각했고, 이들이 과학의 내용을 더 깊게 천착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사회적 요소를 끌어들여서 과학적 지식의 형성을 사회적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이런 주장을 낳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사회구성주의자들의 평가에 못마땅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