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10th, 2019

February 10, 2019: 5:14 pm: bluemosesErudition

“And you were dead in the trespasses and sins in which you once walked, following the course of this world, following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the spirit that is now at work in the sons of disobedience — among whom we all once lived in the passions of our flesh, carrying out the desires of the body and the mind, and were by nature children of wrath, like the rest of mankind. But God, being rich in mercy, because of the great love with which he loved us, even when we were dead in our trespasses, made us alive together with Christ —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 and raised us up with him and seated us with him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so that in the coming ages he might show the immeasurable riches of his grace in kindness toward us in Christ Jesus.”(Ephesians 2:1‭-‬7)

: 5:06 pm: bluemosesErudition

잠자던 질문이 눈을 떴다. 무려 24년 만이다.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자에게 내밀었던 종교적 물음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24개의 질문은 A4용지 다섯 장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신(神)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라는 첫 물음부터 “지구의 종말(終末)은 오는가?”라는 마지막 물음까지, 경제계의 거목이 던졌던 종교적 질문에는 한 인간의 깊은 고뇌가 녹아 있다. 그 고뇌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종교적 물음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이 질문지는 1987년 ‘천주교의 마당발’로 통하던 절두산 성당의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는 이를 가톨릭계의 대표적 석학인 정의채(86·당시 가톨릭대 교수) 몬시뇰에게 건넸다. 정 몬시뇰은 답변을 준비했고, 조만간 이 회장을 직접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좀 회복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이 회장은 폐암으로 한 달 후에 타계하고 말았다. 문답의 자리는 무산됐다. 정 몬시뇰은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제자인 차동엽(53·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에게 질문지가 들어갔다. 차 신부가 여기에 답을 준비했다. 그 답을 모아 연말에 『잊혀진 질문』이란 책을 낸다.

: 1:11 pm: bluemosesErudition

116~117. 프로이트는 애도trauer와 멜랑콜리를 구분하면서,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정상성의 양태라면, 멜랑콜리는 상실한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비정상성의 양태라고 말한다. 전자가 세계의 빈곤을 극복하려는 작업trauerarbeit을 통해 새로운 대상으로 옮아간다면, 후자에서는 새로운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자아에 리비도가 머문다. 대상은 우울증적 주체의 내부에 녹아버리고, 주체가 대상으로 물화되어버리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구분이 상실과 결핍의 착란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대상의 상실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상실했다고 생각했던 그 대상이 실은 처음부터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부재했던 대상이 잃어버린 대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때 멜랑콜리가 생겨난다. 대상은 그 결핍(부재)에서 출현한다. 처음부터 상실해본 적 없는 대상이, 그 상실이 제스처 속에서 역설적으로 떠올라오는 것이다. 시인이 “나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대성당이다”라고 외칠 때 겨냥하는 것이 이것이다. 대상의 상실이 아니라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낮의 시간과 질서가 아닌 밤의 시간과 질서를 제 안에 마련하는 것.

118. 내가 때리자 되돌아오는 저 샌드백처럼, 묵중하게 내게 안겨오는 어떤 구체가 있다. 상실의 몸짓이 오히려 부재했던 실체를 불러왔다. 나는 너를 안았는데, 내게 안긴 것은 샌드백이었다. 사랑에 대한 후일담이 사랑보다 앞선다는 게 이런 뜻이다.

120~121. 자동사적인 발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기호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발화다.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가 주체가 의도한 단일한 판에 이식되지 않고 의미들을 거느린 채 다른 기호들로 전이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니피앙들 곧 ‘여러 개의 기호’가 하나의 ‘기호의 기호’를 시니피에로 갖는 것. 그래서 그것은 통상의 관점에서 보면 (벤야민의 말대로) ‘기호의 폐허’이지만, 자유롭고 무한한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호의 공장’이기도 하다. 둘째, 기호의 물질성이 강조되는 발화다. 자동사적인 발화는 의도의 차원으로 축소되지 않으므로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물질이다. 이 기호들도 시적 세계의 구성물이다. 발화되는 순간, 소리(청각 영상)와 이미지(시각 영상)로 전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 자체가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지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발화다. 물론 이때의 지속성은 단일한 실체의 연장이 아니라, 계기적인 것이다. 발화의 시간을 분절하면서 잇는 것이기에, 그것은 연속성과는 다르다. 한 기호가 다른 기호로 전변하면서 끊임없이 시니피에들을 생산하데 된다. 이 역시 시적 세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넷째, 그것은 무의식의 구성방식을 따르는 발화다. 곧 은유와 환유의 운동을 허락하는 발화다. 하나의 대상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전이하는 방식이 바로 은유와 환유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시적 발화에 속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동사적인 발화는 시적인 발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광기가 천재를 낳는다고 말한 이는 플라톤이고, 모든 천재는 멜랑콜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괴테 역시 시를 낳는 특별한 재능이 멜랑콜리에 있다고 보았다.

127~128.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늑대인간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여러 마리의 늑대를 단 한 마리의 늑대로, 결국에는 영(0, zero) 마리의 늑대로 환원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일곱 마리가 표상을 위해 동원되는 과정에서 다양체로서의 제 성격을 잃었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소감은 이렇다. “누굴 놀리는 건가? 늑대들은 도망쳐서 자신의 무리를 찾아갈 기회를 결코 갖지 못했다. 애초부터 동물은 부모들 간의 교미를 표상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분열증자는 표상을 위해, 동일성을 위해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목소리들을 제 자신의 분열을 통해 보존한다. 이를테면, 다섯 명의 시인들, 다섯 마리의 새들, 그리고 다섯 마리의 늑대들.

_ 권혁웅, “멜랑콜리 펜타곤”.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 해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