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116. ‘시가 무엇이 될 수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로 무엇을 하겠다는 사람도, 자신이 시인임을 자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인으로서의 외연만을 넓히며 사는 이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좋다. 목소리가 작고 타인의 감정에 도통 개입하지 않으며 사소한 일에도 불필요할 정도로 마음을 쓰는 이도 좋아한다. 그가 만약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시로 할 수 없는 일들로 자주 좌절하며, 자기합리화와 도피 끝에 자신의 오래된 고통을 직면하고는 다시 문장 하나를 겨우 건져내는 이가 좋다. 내가 아는 손택수 시인의 모습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하는 그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의 시를 좋게 읽을 때 나는 “고통을 과장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곧잘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등단작을 떠올린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햇빛의 스펙트럼보다 더 너른 빛이 담겨 있던 시.

118~119. 노동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소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 시인들이 구성하는 세계는 간혹 소비되지만 소진되지는 않는다. 이제 자본의 체제 내에서 누구를 고용하지도 않고 스스로 고용되지도 않는 존재는 시인만이 유일하다. 하지만 시를 쓰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노동자가 곧 시인이라는 것, 다시 말해 체제 내의 노동자가 체제 밖의 시를 써야 한다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119~120. 스무살 무렵 부산의 안마시술소에서 현관 보이로,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던 시절, 손님이 뜸한 새벽 시간이면 부산 각지에서 전화를 걸어온 맹인 안마사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낮에는 늦깎이 학생으로 밤에는 학교 수위를 보며 시를 적었다던 일화들 … 이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더 처절했다. 다른 출판사로 이직을 한 그가 ‘기획실장’ ‘편집주간’에 이어 ‘대표이사’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갖고 있을 때 나는 그와 같은 회사에서 막내 직원으로 일했다. 내 눈앞에는 ‘시인 손택수’가 없었다. 대신 노동에 찌든 ‘생활인 손택수’를 자주 목격했다. 그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밥벌이 강의를 쫓아다니고(「빗방울 화석」) , 살림이 어려운 회사를 위해 투자자를 찾아다니느라 동분서주하고(「물 속의 히말라야」), 심지어는 원고가 반려된 필자로부터 ‘밥버러지’ 소리까지 들어가며(「폭포를 삼킨 모기」) 일했다. 그때쯤 그는 불면증과 위장질환 등에 극렬하게 시달렸던 것 같다. 시인과 노동자 사이에서 완벽히 고립된 것처럼 보였는데 누가 보아도 그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

124. 지역별 개화 시기로 계산한 꽃의 속도는 시속 1.2킬로미터 정도이다. 제주에 벚꽃이 피고 보름 정도가 지나면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동네에도 벚꽃이 핀다. 제주와 서울은 직선 거리로 4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봄은 시속 약 1.2킬로미터로 푸른 바다와 흙빛 선연한 남도의 땅을 거쳐 올라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꽃의 속도가 아이들의 걸음 속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125~126. 나는 그가 계속 이 공공의 영역에 머물며 물신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에 서툴렀으면 한다. 그가 정착하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철 지난 사랑이나 함부로 대했던 과거의 시간 같은 것에 기웃거렸으면 한다. 마음 같지도 않고 마음만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 잦았으면 한다. 독선의 끝에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한다. 비굴함을 조금 덜어내는 대신 여지없이 남루가 남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계속 앓으며, 앓는 소리를 받아적은 시를 써주었으면 한다. …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의 시집을 덮으며 나는 다시 에밀 시오랑의 말을 떠올린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 영원이라면 이미 우리의 삶은 영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삶에서 우리는 울지 않으려고 노래를 부를 것이다.

_ 박준, “울지 않으려 부르는 노래”. 손택수의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발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