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23. 나는 류가사키에서 1973년에 태어났다.
29. 어머니는 매일 밤마다 나와 동생에게 그림책을 읽어줬다, 하루에 적어도 두세 권은 꼭 읽어줬는데, 매일 힘들게 일하고나서도 우리하고 한 약속을 한 번도 빠짐없이 지켰다. 그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31. 아이들의 식견 넓히는 것은 어머니의 교육 신념 중 하나였다. 내가 여섯 살 때다. 갑자기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이 주간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우리 가족의 경제 사정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대담한 결정이었다. 여행 자금은 어머니가 일을 해서 모은 건지, 아니면 외갓집에서 빌린 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머니에게 돈의 출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 같다. 빚을 떠안고 있는 빈곤한 생활보다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게 훨씬 중요했을 테니까. 이듬해에는 셋이 함께 여행할 돈이 없어 외삼촌이 살고 있던 밴쿠버로 나만 보냈다. 그 말인즉슨 나혼자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인데, 승무원이 가슴에 달아준 ‘보호자 없이 여행하는 어린이’라고 적힌 배지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다음 해에는 어느 정도 벌이가 있었는지,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독일을 오가며 한 달쯤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언제나 앞장서 걸었다.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과 더 많은 경험을 선물하기 위해서라면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0. 어머니와 공부하는 동안 나는 칭찬받은 기억밖에 없다. 아이들이 칭찬을 받을 때, 그 무엇보다 기뻐한다는 걸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전에는 지루해서 몸을 배배 꼬던 공부 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작전에 보란 듯이 넘어간 것이다. 어머니는 한동안 막혀 있던 문제를 풀어내기라도 하면 손을 크게 흔들거나 가끔은 악수를 청하며 소리 높여 칭찬했다. 또 공부에 지겨운 내색을 보이면 “집중!”하고 구호를 외쳤다. “한 번 성공해보면, 다음에도 반드시 성공할 거야!” 이건 어머니가 자주 하던 말인데, 지금도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말이다.
34~35. 류가사키라는 작은 마을의 숲속에는 서양란을 키우는 넓은 비닐하우스가 있었고, 그 귀퉁이에 사이좋은 네 가족이 사는 집이 있었다. 바닥도 벽도 모두 나무로 만들고, 천장에는 등유 램프를 매달아놓은 고즈넉한 산장을 닮은 집이다. 거실에는 부부가 학창 시절부터 수집한 굉장한 양의 책이 선반을 가득 메웠다. 레코드플레이어와 스피커를 장만한 날에는 밤늦게까지 음악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들의 삶을 즐기려고 했다. 작은 집에는 사랑도, 유머도, 서로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말다툼 소리가 끊이지 않는, 위태로운 집이 되고 말았다. 정말, 너무도 슬픈 일이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은 결국 이혼했다. 두 아들을 위해 이혼한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쭉 이어졌지만,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남녀가 부부로서 존재했던 것은 그 십 수 년에 불과하다.
47. 어머니와 정기적으로 만났고, 단출한 집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딱히 배가 고팠던 기억도 없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요와 이불도 있고, 목욕도 했다. 여름에는 헤엄쳤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눈이 오던 겨울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판 저편으로 보이는 우리 집에서 전구 빛이 새어 나와 밝게 빛났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꽤 가난했고, 어머니가 없는 작은 집인데도 우리 집은 늘 따뜻했다. 그리고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부유함과 즐거움이 꼭 비례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48.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밤에 불쑥 내 침실에 들어온 아버지가 내일은 영화를 보러 갈 거니까 학교는 쉬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학교에 전화해서 대충 꾀병을 부리고 아버지와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며칠 전에 이 영화를 혼자서 봤는데 무척 감명을 받았다고, 그래서 나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끌려가서 보게 된 영화는 1984년에 개봉된 영화 <킬링 필드 The Killing Fields>였다.
50. 그 뒤로도 아버지는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바탕 삼아 두 아들을 가르쳤다. 한번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도입부에 있는 마사이족의 전설을 인용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했다. “킬리만자로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는 바짝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 내가 그것을 읽고 나자 아버지는 대뜸 “넌 그 이유를 알겠냐?”하고 묻더니 “사람은 왜 살아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생각해야 한다”라며 말을 이어갔다. 또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도 헤밍웨이의 작품들과 함께 읽게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책과 영화, 매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다. 하루는 내 책상 앞에 처음 보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괴로워도 일하라. 안주하지 마라. 이 세상은 순례의 길이다.” 북유럽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수필집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은 그제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53~55. 아버지는 슈퍼마켓 안에 걸린 도예교실 포스터를 마주하고는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고 했다. 손에는 이미 도예교실 신청서도 들려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같은 궤도를 반복해서 돌던 쳇바퀴를 스스로 멈췄다.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것이다. … 아버지 말로는 도예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선생님의 실력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중략) 아버지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도예가 반열에 올랐다. 이제 막 마흔이 되던 해였다. 안정된 직장도 없이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불안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진심으로 원하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73. 크리스천인 어머니를 위해 목사를 불러 기도를 한 적도 있는데, 그 기도가 어머니에게 전해졌을까? 우리가 부르고, 또 부르던 목소리는 어머니에게 잘 전달됐을까?
82.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은 내가 열네 살이 되던 해였고, 내 인생의 큰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열일곱 살이 돼서다.
99~100. 아버지도, 어머니도 빠를수록 좋으니 해외로 나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 (중략) 아버지가 말했다. “겐, 남자라면 황야로 행해라.”
100. 여행 경비는 어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보험금으로 충당했다. 원래는 대학 등록금으로 쓰일 돈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용도가 바뀐 걸 어머니가 알면 뭐라고 할까?
109. 여행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역시 첫날이다. 나는 에스파냐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론다’라는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126.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성공이나 어떤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다른 종류의 거였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감각을 기르면서 나는 살아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155. 2000년대의 독일 함부르크를 무대로 한 <소울 키친>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인 셰프가 도무지 의견이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그만두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거센 바람이 부둣가에 서서 이렇게 외친다. “속여서는 안 돼! 사랑과 섹스와 전통만은!”
158~160. 적막이 감도는 어색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시바 료타로의 <세상을 사는 나날들>이었다. 에도 말기의 조슈 번을 배경으로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인데, 그때까지 해외 작가의 소설만 읽던 나에게 시바 료타로의 문체는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을 연달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이를 먹은 뒤에더 여전히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에도 말기의 조슈 번, 지금의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다. 언제부터 무사로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데, 상황을 대처하는 판단력과 그에 따른 행동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다카스기 신사쿠는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의 진보적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눈에 띄는 성과를 차례로 거둬들였다. 격변의 시대, 그의 행보가 점점 더 가속화됐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막부의 권위가 곤두박질하던 때라고는 하나 행렬 중인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1846~1866, 에도막부의 제4대 장군)에게 “어이, 정이대장군!”하고 아랫사람을 부르듯 부르고 도망친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또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건설 중이던 외국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 최초로 신분의 구분 없이 군대를 징집하기도 했다. 자신의 영토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산꼭대기에 있는 절에 올라가 조슈 번의 대장부로서 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선언하고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말을 타고 출정한 지 얼마 안 있어 반신반의하던 부하들의 걱정을 날려버리듯 전리품으로 얻은 군함을 타고 개선 행진을 했다. 나에게 그의 행동이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실상은 서투른 일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을 살아가는 내게 그의 수법은 꽤나 멋있었다. 뭐랄까, 들인 노력에 비해 일어난 변화가 매우 컸달까? 근성이나 비상한 머리만으로는 그런 일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카스기 신사쿠는 타이밍의 귀재가 아니었을까?
166~167. 타인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나는 나만의 가치관을 관철시키는 동시에 인정까지 받으려고 했다. 대체 어떡해야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나도, 다른 사람도, “정말 좋다!” 하고 소리치게 만드는 곡이란 대체 어떤 걸까? (중략) 본래부터 나의 음악은 시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마지막 기회인 만큼 시로 마음껏 표현해보자. 끝까지 한번 가보는 거다. 나 스스로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다.
197~198. 고심 끝에 내놓은 브랜드명은 ‘발뮤다BALMUDA’라는 조어로 정했다. 음악을 하던 시절, 노래하다보면 마이크 안으로 바람 소리가 들어갈 때가 있었다. 대체로 ‘ㅂ’과 ‘ㅍ’으로 시작하는 소리가 그러한데, 닫힌 입술을 여는 동시에 숨을 뱉어내면서 공기의 흐름이 빨라져 마이크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 버리는 현상이다. 곡을 녹음할 때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될 소리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 소리에는 어떤 기세가 있다. 다시 말해 힘을 가신 소리란 거다. 그렇게 나는 첫 글자를 ‘B’로 정하고, 이어질 모음은 가장 밝은 느낌의 ‘A’로 정했다. 발뮤-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느껴지는 뉘앙스는 남유럽의 영향이 크다. 바싹 마른 공기 안에서 빛과 그림자가 춤을 추고, 역사와 맛이 교차하던 분위기를 나는 사랑했다. 막연히 라틴의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르미지아노Parmigiano’라든가 ‘카탈루냐Catalunya’라든가 ‘프론테라Prontera’같이 깊은 맛이 나는, 오래되고 묵직한 느낌이 나는 이름 말이다.
232~233. 사람들이 발뮤다 디자인의 제품을 사지 않는 건 비싸서가 아니었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멋있는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먼저였다. 왜 그걸 몰랐을까?
236.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회사는 주저앉을 것이다. 어차피 망해버릴 거라면, 이왕 넘어지는 거라면 앞으로 넘어지자고 생각했다. (중략) 황급히 공기와 유체역학에 관한 개발에 착수했다. 당연히 그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었다.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유체역학에 관한 책 세 권을 사와 단숨에 읽었다. 그때 유체역학의 기초를 어느 정도 익혔는데, 무엇보다 유익했던 내용은 세 권 중에서도 가장 전문적이고 읽기 어려운 책에 나와 있었다. 그 책에서는 유체역학으로 밝혀내지 못한 현상이 아직 많다고 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학자도 모르는 게 많다니! 넓은 범위에서 보면 나나 그들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피차 모르지 않나. 초심자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238~240. 집 근처의 작은 공장을 찾아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몸시 더운 날이었다. 공장 직원들이 커다란 선풍기 앞에 모여 있었는 데, 선풍기 모양이 달라 보였다. 조심조심 다가가 자세히 보니 선풍기가 벽을 향해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누군가 “몰랐어? 이렇게 하면 바람이 더 부드러워지거든”하고 말했다. (중략) 대체 바람을 어디에 부딪히게 만들어여 할까?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서른 명의 초등학생이 옆 학생과 다리를 묶어 달리는 ‘30인 31각’이라는 방송이 있었다. 요컨대 길이가 긴 2인 3각 게임이다. 2인 3각도 달리기 힘든데, 서른 명이 길게 이어져 있으니 호흡이 어지간히 맞지 않고는 속도를 내기가 힘들다. 그뿐이 아니다. 경기에 참가한 서른 명 중에는 발이 빠른 아이도 있고, 유독 느린 아이도 있다. 각각 어느 위치에 배치할 것인가도 이 시합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 그렇다면 그와 같은 현상이 공기의 흐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속도가 다른 두 종류의 바람을 동시에 내보낸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그 아이들처럼 진행 속도가 각기 다른 바람이 한꺼번에 나간다면, 서로 부딪히면서 소용돌이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안쪽으로 속도가 느린 바람을 보내는 날개를, 바깥 쪽에는 빠른 바람을 보내는 날개를 배치해 이중 구조가 되도록 만들면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드러운 바람을 만들려면 바람의 양을 유지하면서 풍속만 떨어트려야 하는데, 이건 날개 면적을 키워서 해결하기로 했다. 회전수를 줄이는 것만으로 바람의 양은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245~246. 시장조사를 하던 중에 내가 원하는 회전속도로 움직이는 ‘브러시리스 DC 모터 Brushless DC Motor’를 발견했다. 그간 선풍기에는 사용한 적이 없던 모터인데, 저회전은 물론이고 미세한 제어도 가능했다. 또 이전의 것에 비한다면 소비전력이 현저하게 낮은 것도 큰 장점이었다. 이렇게 좋은 모터가 선풍기에 사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서다. 모터만도 비싼데, 그걸 제어하기 위한 전자기판 또한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전선 몇 개만 이어붙이면 간단히 돌아가는 기존 모터와는 가격에서부터 기술적인 난이도까지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268~269. 신제품 발표회를 열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 선풍기를 유명하게 만들어야 했다. 신제품 발표회 등의 행사를 위해서는 행사장 대여비, 인건비 등 그 준비만으로도 굉장한 규모의 경비가 필요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가구 브랜드 대표가 자신의 가게에서 발표회를 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롯폰기 미드타운에 있는 넓은 점포를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준비를 도울 사람도 회사에서 보내겠다고 했다. 언론사와 방송국 리스트도 가지고 있으니 초대장을 보내자고, 준비에 필요한 경비도 부담해주겠다고 했다.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나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이렇게까지 열의를 다하는 사람을 본 게 처음이라서”라고 대답했다.
_ 테라오 겐, 남미혜 옮김,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아르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