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2007

July 10, 2007: 3:13 am: bluemosesErudition

1.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 함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은 하나이자 똑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이를 뿐이다. …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인 한, 그의 운수(運數)는 자본에 달려 있다. 이것이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다.”

2.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조차 자본의 이해 관계와 임금 노동의 이해 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가능한 한 급속한 자본의 성장조차, 그것이 아무리 노동자의 물질적 생활을 개선한다 하더라도,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부르주아의 이해 관계, 자본가의 이해 관계 사이의 대립을 철폐하지는 못한다. 이윤과 임금은 그 이전이나 이후나 반비례 관계에 있다.”

3.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급속히 성장하며,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을 위한 고용 수단, 생활 수단은 더욱더 감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임금 노동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인 것이다.”

* ‘07년 5월 2일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성물산 46기 신입사원의 사직서”라는 글을 접했다. 이내 소름이 끼쳤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웃지 못할 희극(comedy)을 목도했다. 밖에서 선망했던 ‘정글의 왕국’이 부단한 재무장으로 경쟁자를 압도하지 못하는 형국에 이를 갈며 슬피 우는 모습은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내는 자본의 육화와 겹쳐진다. 결국 부단한 혁신이라는 숭고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심성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10년 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늘의 행복이라고 믿기에, 현재는 중요한 시간이 아니라 유일한 순간이라고 믿”는다는 ‘그’가 추구하는 행복(being well)은 과연 무엇일까? 

* 윗 글에 대한 답글들 - 대체적인 논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어린 투정’으로 모아진다 - 을 보며, 그들이 꿰고 있는 “세상 물정”이란 무엇일까 하고 다시금 자문한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나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윗글의 역설이 비로소 이해된다.

July 9, 2007: 10:53 pm: bluemosesErudition

모든 징크스와 대결한다. 내게 유일한 불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결별이다.

: 9:39 am: bluemosesErudition

“허기를 쓰레기로 채우지 말라.”

July 8, 2007: 1:40 am: bluemosesErudition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가 이성적일 때에만 이성적인 반박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설혹 그 반박이 이루어졌다해도 그가 이데올로기를 바꾸는 행동은 필연적으로 뒤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에 따라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압박하는 상황 역시 변하지 않을 가능성 또한 아주 높습니다. 노출증 환자에게는 뜨거운 물벼락이 가장 확실한 처방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달리 말해서 존재의 변경은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강유원).”

* “존재의 변경이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변경’이 가능한가? 직업병의 소치라 할 수 있으나, ‘리더십(Leadership)’의 본질은 결국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연적 본성(habitus)’에 대한 호소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덕으로써 사람을 따르게 하지 않고 힘으로써 사람을 따르게 하면 자연히 面從腹背하는 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 관련어 : Fascism, Money-ness, Religion-ness, Learning

July 7, 2007: 5:15 pm: bluemosesErudition

1. 포퓰리즘적 민주주의

  “대통령 권력은 어떻게 ‘초강력 대통령체제(hyperpresidentialism)’가 됐나?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첫째로는 민주화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사람들은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자기 손으로 뽑는 대통령을 민중권력의 체현으로 이해하게 됐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당에서 처음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고 현재 대통령은 이를 통해 당선됐다. 즉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 후보, 국민들이 직접 뽑은 대통령, 이것은 그 말이 표현하고 있듯 국민이 직접 대표를 선출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민중권력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 그런데 대표성의 원리를 뛰어넘거나 국민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은 상당히 포퓰리즘적 요소를 많이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민중성과 직접 닿아있다. 민중성은 민주주의에 민중적 동력과 에너지를 제공하지만, 무매개적으로 그 힘이 드러날 때 그것은 헤게모니에 의한 휩쓸림에 취약하고, 다른 선동 또는 집단적 충동에 의해 휩쓸리거나 동원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은 민주적 요소를 강화시킬수 있지만, [동시에] 충돌할 수도 있는 관계를 갖는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국민의 일반이익을 대표하고,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개혁의 조타수로서 이해되고 이것이 포퓰리즘과 결합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적인 민주주의 요소를 많이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강력한 대통령을 만들게 된 중요한 동력이 됐다고 본다.”

2.  시장 포퓰리즘

  “시장 포퓰리즘이란 신자유주의의 시장관을 대변하는 이념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시장은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 중 가장 자연스런 제도이며, 시장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체제라서 조율자가 필요 없다. 때문에 국가나 특정한 공적 권위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시장은 왜곡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장 포퓰리즘은 시장과 인민을 동일시한다. 민주주의라는 형식과 제도(선거, 입법부, 정부)는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이익과 괴리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인민들의 이익에 더 밀착돼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시장이라는 주장이 도출된다. … 민주화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현상 중 하나는 이런 시장 포퓰리즘[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정당, 정치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이다.이런 관점에서는 민주주의 역시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 내 갈등과 이익의 차이를 정당이 대표하고, 정당의 수준에서 타협하고, 정부가 이를 통해 정책을 펴 사회통합을 이루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과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정치를 굉장히 시장주의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대중정치, 대중의 정치참여, 선거 경쟁 등을 소모적인 낭비로 간주한다. 노 대통령은 개헌이슈를 제기할 때, 한국에서는 선거가 너무 많아 선거를 줄이면 예산절약 효과를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시장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접근하는 대표적인 관점이다. … 민주화 이후 여러 가지 정치개혁이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이런 관점을 통해 이뤄졌다. 깨끗한 정치(반부패, 투명성), 시장효율성의 가치, 원내정당화, 당내민주화, 국민참여경선제, 주민소환제 등의 개혁사안은 대체로 시장 포퓰리즘적 관점을 통해 만들어졌다. 기본적으로 정치와 정당이 대중과 만나는 접촉점을 축소하는 방향이었다.”

3. 민주화 이후의 패러독스

  “현재 정치적인 포퓰리즘과 시장 포퓰리즘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 과거 한국사회에는 국가주의적 이념과 가치가 강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가 견인차가 되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발전국가 담론은 헤게모니를 가지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 바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발전주의에 대한 열망은 제어되지 않고 강하게 유지됐는데,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에서 두 포퓰리즘이 결합될 수 있는 매개고리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지상주의, 즉 노동과 사회복지, 분배의 정의 등을 정책으로 수용하지 않고, 경제의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경향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민주정부는 이것을 개혁으로 인식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알도록 하고 추구해왔는데, 실제로 민주정부의 개혁이란 말 속에는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적 개혁을 뜻한다. 보통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적인 이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정부를 보통 개혁적이라고 하는데 이 민주정부의 실제 정책 내용은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포퓰리즘적 원리와 가치, 비전을 그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었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중요한 패러독스이다(최장집).”

: 1:45 pm: bluemosesErudition

“독일의 상태와의 투쟁에 있어서 비판은 두뇌의 열정이 아니라 열정의 두뇌이다. 비판은 해부용 칼이 아니라 하나의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 논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절멸시키고자 하는 적이다. 왜냐하면 저 상태의 정신은 논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 독일의 상태는 결코 사유할 만한 객체들이 아니라, 경멸할 만한 또한 경멸받고 있는 실존태이다. 비판 자체는 이 대상과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비판과 이 대상의 사이는 끝장나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더 이상 자기 목적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수단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는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 작업은 탄핵이다. …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Marx, 1843).”

* 이론이 생성한 물질적 힘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이론을 논박하는 비판은 해부용 칼과 같은 외양을 갖추나, 그것의 본질은 적의 전멸과 탄핵을 겨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이점에서 비판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 할 수 있으며, 분노를 담지하고 있다.

: 12:55 pm: bluemosesErudition

‘공부한다’는 착각 속에 허영의 포만감만 채워왔다. 무지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HR의 변화경로를 답습한 셈이다. 훈련(Training)에서 학습(Learning)으로, 학습(Learning)에서 성과(Performance)로. 현 수준에서 미래가치를 염두에 두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다만 ‘내가 누구여야 하는가’는 부단히 되새겨야 한다.

: 2:15 am: bluemosesErudition

정직하게 절망한다. 나는 무력하다.

: 1:17 am: bluemosesErudition

‘기약없는 글을 쓰고자 하염없이 글을 읽는다’는 사실만큼 고약한 자해가 있을까.

July 1, 2007: 7:17 am: bluemosesErudition

1. 체제가 부과한 맥락 속에서 망석중 마냥 희노애락하며 마비된 이성을 곁부축하여 시방에 다다른 ‘나’는 누구여야 하며, ‘어쩔 수 없는’ 어용이 구축한 사유와 표현의 감옥을 균열낼 방도는 무엇인가.

2. ‘조국안보’란 미명으로 타인의 일상을 제약하는 국가의 지양은 위계를 갖추고 있으나 동시에 위계를 괄호칠 수 있는 축소지향적 공동체를 필요조건으로 요청한다(cf. Genesis 11:1~9).

* 비즐러가 양팔로 자신을 감싸안은 채 마치 연극을 감상하듯 드라이만과 질란트의 인간적 교류를 엿들은 뒤, 창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가지 말아요”라고 신음하는 대목에서 - 얼마 후 그는 드라이만의 <브레히트> 선집을 몰래 가져와 읽는다 - 내성의 임계점에서 예술로 도피한 이들의, 또한 그 예술에서 대안을 모색한 이들의 심경을 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