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1st, 2008

June 1, 2008: 7:16 pm: bluemosesErudition

인생의 의미를 구약은 ‘향락’(전2:24)에서, 신약은 ‘공의’(마6:33)에서 발견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후자를 붙잡겠다. 예수의 제자로서. 주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목표는 있으나 목적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My prayer is not that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protect them from the evil one. … Sanctify them by the truth; your word is truth. … Holy Father, protect them by the power of your name -  the name you gave me - so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one..”(John 17: 15, 17, 11)  제자는 세상을 외면하고 공전하는 이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진리 곧 말씀을 붙들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며, 홀로 할 수 없으니 연합하기를 힘쓰는 자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아멘.

: 6:38 pm: bluemosesErudition

역사적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각각 제사장과 왕에 빗댄다면, 언행은 선지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죽었으나, 선지자로 살았다. 신분/지위와 그에 상응하는 권능/영향력의 측면에서 오늘날 제사장의 역할을 목회자와 신학자가 담당한다면, 왕의 역할은 ‘장로’ 정치인과 기업인이 수행하고 있다. 그들이 생산-유통하는 교계의 주류 담론에, 나는 한편으로 수긍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외면하였다. 다시 말해, 숭고한 제사장을 추앙하면서 타락한 왕을 조롱하였다. 서준식이 그리하였듯, 예수와 맑스를 동시에 - 맑시스트가 아닌 크리스챤으로서 - 구현하기 원했다. 그러나 나의 사상은 시나브로 소수파의 주류 담론에 포획되고 화석화됨으로써 예상치 못한 시공 가운데 돌출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일각에서 에센파로 추정하는] 세례요한을 거부한(눅7:30) 것과 동일한 행태를 취한 것이다. 물론, 플로리다 부흥(Florida outpouring)의 명사이자, 제2의 베니 힌으로 거론되는 토드 벤틀리(Todd Bentley)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다만, 니고데모의 자세를 견지할 필요성을 되새긴다. 이러한 점에서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글은 필독할 가치가 있다.

: 5:05 pm: bluemosesErudition

01. “수술 중 각성. 전신마취 수술 시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마취상태로 보이지만 환자의식이 깨어나서 수술의 전 과정을 그대로 경험하는 현상. 수술 중 각성이 발생한 환자는 수술의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하지만 근이완제를 투여받은 상태이므로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하지 못한다. - 몸에 들어가는 마취제는 신경마취제와 근육마취제가 있는데, 이중 신경마취제에 이상이 생겨 수술 도중 환자가 깨어나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때 ‘수술 중 각성’을 경험한다 - 이런 끔찍한 경험은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일으켜서 절반 이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는다.” 참고 : ‘리턴

02. 환상으로부터의 탈주가 부정의 끝에서 되찾는 긍정, 즉 ‘능동적/완성된 니힐리즘’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주체가 제기하는 ‘비판의 무기’ 너머 물질이 제시하는 ‘무기의 비판’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의식화는 구도자의 “수술 중 각성”을 야기해 ‘초인’을 제안한 니체마냥 ‘광인’으로 여생을 소진케 한다.

* 모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네오를 맞이한다. “실재계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