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라피언 경제학
거시적 사태의 미시적 원인 분석과 미시적 사건의 거시적 원인 파악의 절충이자 통합이 네트워크 이론이다. 네트워크의 구축 경향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게임이론이라면, 그것의 정치사회적 실효성을 제시하는 것이 ANT라 할 수 있다.
1. 대부분의 과학(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하는 그 무엇이다.”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자들이 과학사에 과민반응하는 모습을 외려 ‘과학의 계몽적 정신’을 위반하는 행위라 생각하곤 한다. ‘과학’이 그런 과거를 갖고 있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관해 말한 것처럼) 과학적 정신이라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블루어 같은 과학사회학자들이 그들의 스트롱 프로그램을 정확히 ‘과학에 관한 과학’이라 부른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블루어는 과학자들의 과민반응에서 19세기 성서문헌학에 대한 기성신학자들의 과민반응을 떠올린다. 면면한 계몽주의적 정신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길을 가려는 인물들이 라투르, 피커링, 해러웨이 같은 이들이다. 혹자는 하버마스 대 푸코의 대결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고 그런 인상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또 아니다.
2. 라투르는 푸코와의 관계를 명시하지 않지만 ANT를 함께 만든 이들은 푸코의 담론의 물질성, 지식/권력, 장치 개념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고 이는 이미 여러차례 지적된 바있다(아감벤이 패러다임과 장치에 관해 쓴글이 있다. 흥미로운 글이다). 과학사학자들 중에서는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운집해 있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역사적 인식론/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다스턴, 조르그-라엔버거, 클라인 등등이 대표격이다. 이들 중 중요인물들이 푸코에게서 얼마나 다양한 것을 배웠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다스턴은 푸코에게서 역사적 불연속성 및 일종의 역사주의를 배웠다. 그가 상상력, 호기심, 객관성에도 역사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이유다. 과학철학자들 중에서는 … 과학을 사실상 명제 혹은 진술의 집합이라 생각하는 거대한 집단을 제외하고 남는 이들 정도가 될듯하다. 해킹, 카트라이트, 갤리슨 등등(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세기말 유럽’을 만나게 된다). 해킹은 선-정상과학(immature science)을 다루는 법, 자연과학/사회과학을 구별하는 법을 [푸코로부터] 배웠다. 예컨대 자연과학이 자연종을 다룬다면 사회과학은 사회적 종을 다룬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에서는 지식이 대상에게 영향을 주는 환류효과(looping effect)가 생긴다.
3. 해킹은 자신의 철학을 역동적 유명론이라 지칭한 바 있다. 라투르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하만에 따르면 라투르는 세속적 기회원인론자이다. 다스턴은 일종의 신역사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러면 푸코는 이 모든 철학의 종합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그리 생산적이지 않다. 푸코 자신이 ‘내가 언제나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푸코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해킹이 푸코에 “관한” 책을 썼다가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결론은? 요컨대 이런 역사성을 인지하고 있는 과학사학자, 과학사회학자, 과학철학자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 이 분야도 ‘패러다임을 갖춘 분과’가 된 것이다. 페미니즘이나 포스트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다른 의미에서 비판적 정신을 이어가고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