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전략(戰略)인가, 정략(政略)인가. 돌이켜보니 후자인 듯 하다.
조직 내외의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위기관리는, 다수의 배심원(이해관계자)에게서 호의적 판결(Good Guy In Misfortune)을 유도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과학이 ‘과학적’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실을 말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갖은 발품을 다 판다는 데 있다.”
1. “30대 이하로 내려가면 사태가 달라진다. 10~30대에 이르는 청년층은 아침마다 신문 들고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이들은 인터넷에 기초한 정보습득에 길들여졌다. … 한국의 청년 세대는 신문을 정독한 적이 없고, 방송 뉴스를 챙겨본 적이 없다. 이로부터 <나꼼수>가 착안한 시장이 생겨났다. … <나꼼수>는 본격 정치 뉴스·논평·비평의 주류에 뛰어들었다. 정치 뉴스에 제대로 노출된 적 없는 10~30대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2. “<나꼼수> 열풍의 핵심은 그들이 본격 정치 뉴스를 다룬다는 사실에 있다. 30대 이하에게 <나꼼수>는 <월간조선>이다. < 월간조선>은 ‘탐사·심층 보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실제로는 맥락, 배후, 욕망, 그리고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 사건의 주인공들이 어떤 연관을 서로 맺어 어떤 욕망을 위해 무슨 일을 벌였는지 폭로하는 방식으로 뉴스를 생산해왔다. <월간조선 >을 읽고 나면, “신문·방송 보도에 나오지 않은 더 큰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쾌감을 위해 지속적으로 월간지를 소비하게 된다. 지루하고 복잡한 정치 뉴스를 주무기 삼은 월간지가 그토록 오랫동안 충성독자를 거느린 ‘장수 매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3. “<월간조선>과 <나꼼수> 모두, 기성언론의 기계적·중립적 정치보도에 기갈난 대중에게 △뒷이야기 △주요 (배후)인물 △사건 사이의 큰 맥락 △맥락을 파악할 비평적 관점 △더 나아가 진위, 선악, 흑백을 분명히 하는 ‘정파적 관점’까지 제공하면서 독창적인 정치 보도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두 프로젝트는 보수와 개혁, 노년층과 청년층, 두꺼운 활자매체와 기동력있는 팟캐스트 등으로 구분되지만, 각각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 정치보도의 정수는 주요 행위자를 잇는 복잡한 고리를 규명하여 풍부한 맥락과 함께 날카로운 비평을 함께 제공하는 데 있다는 점을 두 매체는 반세기를 격차로 하여 거듭 입증해 보였다.”
*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이것이 소비되는 탐사 보도이다.
1.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paideia) 문제가 논의된다. 소크라테스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안된”, 즉 희랍의 폴리스에서 오랫동안 시행되어 온 교육으로 “몸(sōma)을 위한 교육”인 체육(gymnastikē)과 “혼(마음: psychē)을 위한 교육”인 시가(詩歌: mousikē)를 들고, 후자부터 검토하자고 한다.
2. 희랍 세계에서 영웅은 공동체의 수호자였다. 그들에 대한 정의(定義)는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옛날에는 헬라스인들과 대륙의 해안지대나 여러 섬에 살던 비헬라스인들이 배를 타고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해적질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해적질은 유력자들이 주도했는데,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고 백성들 중 약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성벽도 없이 사실상 여러 마을로 구성된 도시들을 습격하며 재물을 약탈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주된 생계 수단이었다. 또한 이것은 수치스러운 짓이 아니라 일종의 영광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 점은 대륙에 거주하는 일부 부족이 해적질에 성공한 것을 오늘날에도 뭔가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5)
문봉주의 「새벽형 크리스천」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복잡다단한 성화의 여정을 인도한다. 질그릇(혼)의 외부와 내부 혹은 그것을 조형하는 기력과 그것이 수용하는 영성에 대한 통찰은 마음의 체제(frame)에 대한 교정된 시각과 함께 묵상을 향한 열망을 선사하였다. 평안을 희구하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말이 곧 영의 통로”라는 가설을 접했다. 이천수의 「예수공학」에 기대를 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