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pril 19th, 2013

April 19, 2013: 11:43 pm: bluemosesErudition

“대중의 각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입을 싹 닦아버리면 끝인가. ‘당신들은 전부 속고 있다’는 식의 폭로야말로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에 기반한 가장 순진한 형태의 계몽신화가 아닌가. 특히 대중의 무지와 탐욕을 탓하며 자기 계발 담론을 악마화하는 식의 주장은 그저 도덕적 비난에 불과하다. … 미셸 푸코는 “자신과 자신의 관계에서만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그저 자리를 바꿀 뿐 권력관계가 그대로라면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그가 주목한 것은 고대의 주체화 방식인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 너의 영혼을 돌보라)’였다.”

: 1:28 pm: bluemosesErudition

“‘윤리’의 옷을 입고 등장하며 규범에 구속된 특정한 생활양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이 일차적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적수는 전통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의식과 행동 방식이었다.”

: 3:44 am: bluemosesErudition

“나는 비폭력이란 말을 간디(Gandhi)가 사용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쓴다. 곧 우리 마음 안에서 폭력이 가라앉고 자연스럽게 본성인 연민으로 돌아간 상태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할 때도 종종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대화 방법을 … ‘연민의 대화(Compassionate Communic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NVC라는 줄임말은 이 책 전반에 걸쳐 ‘비폭력 대화’나 ‘연민으로 의사소통하기’라는 말을 대신해 쓰인다.”(M. B. Rosenberg)

: 2:52 am: bluemosesErudition

인지와 정서가 분리되면 영적 가면을 쓴 거짓 자아가 생성된다. 억압된 욕구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서 극단적 방식으로 분출된다. 비근한 예가 목회자나 인권운동가의 성 추행이다.

: 2:35 am: bluemosesErudition

1. 향심기도는 “주의를 집중(어텐션)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려고 지향(인텐션)하는 기도입니다. 즉 어떠한 행동(doing)을 하는 기도이기보다 하느님 곁에 머물러 함께 존재(being)하려는 기도입니다.”

2.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토머스 머튼과 그리피스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향심기도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기도라는 이런 의미를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존재의 중심에 이르러야 우리의 참 자아를 얻어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서 벗어나 침묵하며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르십시오. 하느님은 내면에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와 ‘기쁨’, ‘주님’, ‘빛’, ‘사랑’과 같은 거룩한 단어를 의식 속으로 불러들이세요. 생각과 느낌과 감각이 일어나면 그것(분심)을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 ‘거룩한 단어’를 불러들이세요.”(Thomas Kea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