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근대의 기원에 관해서는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430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채택했던 시점, 1520년 교회의 권위에 대한 루터의 반란,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 1776년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 1895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및 회화와 문학에서의 모더니즘의 발흥 등. 이 중에서 어떤 기원을 채택하느냐는 논의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철학에 있어 근대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의 ‘자기의식’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왜 이를 철학적 사색의 원리로 정립했는가 또는 이 원리의 형성 배경은 무엇인가, 이러한 시도는 데카르트 혼자만의 것인가 아니면 그의 동시대인들이 공유한 일종의 시대정신인가?”
“에라스무스에서 몽테뉴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저술은 도시풍의 열린 마음과 회의적인 관용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평신도 문화의 새로운 특징이었다.” 이것은 중세의 종교적 지배를 뚫고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데 “17세기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 합리성을 제한하면서 거의 기하학적인 확실성이나 필연성만을 인정했다. 이론물리학은 이성적 연구와 토론에 적합한 영역이었지만, [16세기에 융성했던 실천철학들인] 윤리학과 법학은 그렇지 못한 것들로 간주되었다.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합리적’ 절차들을 존중하기는커녕 모든 주제들을 형식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희망을 추구했다. 그들은 오직 형식적으로 타당한 증명에만 몰두함으로써 ‘이성의 언어’ 그 자체를 바꾸어 버렸고, 결국에는 ‘이성(reason)’, ‘이성적(rational)’, ‘합리성(rationality)’ 같은 핵심 용어들의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전환, 넓게는 16세기의 인문주의적 근대에서 17세기의 이성주의적 근대로의 전환을 불러온 결정적인 사건은 30년 전쟁이다.”
“30년의 잔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거치는 동안, 외세들은 수시로 파트너를 바꾸어 가면서 독일과 보헤미아 전역을 일종의 연무장으로 사용했다. … 독일과 보헤미아는 납골당으로 변해버렸다.”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데카르트는 20대 초반이었고, 마침내 1648년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생애는 2년 남아 있었다. 그는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삼십년 전쟁의 그늘 밑에서 보낸 셈이다.” 그가 추구한 확실성의 원리는 “30년 전쟁의 와중에서 노출된 정치적, 사회적, 이론적 혼란에 대처하기 위한 응전이었다.”
“1570-1610의 시대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충만한 때이다. 인문주의 정신은 “이론과 교리가 경험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610-1650의 시대는 대재앙의 분위기 속에서 “유럽인들은 신학적 논쟁에 몰두한 나머지, 특정한 교리 보다는 ‘믿음 그 자체’를 믿기에 이른다. 모두가 동의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세기의 데카르트는 최소한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명석판명한’ 수학적 개념”이라는 창백한 원리에 호소한다.”
30년 전쟁 이후, 우주적 질서(cosmos)와 사회적 질서(polis)의 통일(cosmopolis)을 정초했던 합리성의 원리와 그 체계는 “과학적 장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장치이기도 했다. … 그 과학적 세계관은 행성 운동이나 조류의 간만을 훌륭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의 정치체계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