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7th, 2014

May 7, 2014: 11:52 pm: bluemosesErudition

밀려날까, 도태될까 내심 염려하면서도 나태하다. 기본을 하찮은 영역이라 치부하며 실체 없는 역량을 논한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냉소하고 비난하다 이내 부끄러워진다. 그러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 삶이 조정되지 않는 이유다. … 최선을 택해야 한다.

“you then who teach others, do you not teach yourself? While you preach against stealing, do you steal? You who say that one must not commit adultery, do you commit adultery? You who abhor idols, do you rob temples? You who boast in the law dishonor God by breaking the law.”(Romans 2:21-23 ESV)

: 10:53 pm: bluemosesErudition

“도시에 취업한 농민공(農民工) 약 2억만 명은 여전히 도시호구를 얻지 못하고 불법체류자의 신세에서 주거, 의료,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지내왔다.”

: 9:53 pm: bluemosesErudition

이윤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

: 3:45 pm: bluemosesErudition

우사인 볼트는 선천성 척추측만증 환자이다.

: 12:48 am: bluemosesErudition

“절대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종교적, 정치적 예언들에 대한 지속적 투쟁이 이루어졌다. 국가는 묵시론적이고 점성술적인 미래 해석을 억압하면서 미래를 독점하려 했다.”

“1670년에 스피노자는 가장 철저하게 예언을 비판했다. 그는 종교적 비전이란 당대에 명망을 얻고자 하면서 국가를 위협하는 정파들이 흔히 사용하는 핑계거리라고 몰아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경의 예언자들조차도 원시적 상상력의 희생자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철학이야말로 근대 초기를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면서 새로운 미래와 더불어 … 근대를 열었던 장본인이다. … 합리적 예측과 구원을 확신하는 기대의 혼합은 18세기의 특성이었고 이것은 진보로 이어졌다.”

근대 역사철학의 정초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다음과 같은 단언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우리의 시대는 탄생의 시대요. … 정신은 지금까지의 정재와 표상의 세계와 절연하고 … 결코 정지하지 않고 항상 전진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고대의 순환적 시간 개념, 중세의 종말론적 시간관을 폐기하고 성립된 근대의 미래 구상은 합리적 예측과 역사철학에서 표상되었다.”

“혁명(revolutio)은 본디 하나의 순환, 정체(政體)의 순환, 자연적 순환에의 종속임을 의미했고, 이것이 정치세계에 적용될 때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없음을 함축하였거니와, 이러한 용법에서 혁명은 고대법의 복원, 진정한 정체로의 회귀를 가리켰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새로워진 1789년 이후 이 용어는 혁명적인 의미 변화를 겪으면서 역사철학의 핵심 술어로 자리잡는다. “장기간에 걸친 사건이나 특히 갑작스러운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의식적 은유”이건 “미래를 인식하고 장악하는 것”으로서의 유토피아적 전망이건 혁명은 구원을 확신하는 기대가 즐겨찾는 술어가 되었다.”

“자연과학적 시간에 바탕을 두었다는 합리적 예측과 종말론의 근대적 변형판인 역사철학의 혼합, 이것이 종교를 폐기한 근대의 정치를 규정한다.”

: 12:47 am: bluemosesErudition

코젤렉의 지적처럼 “30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인들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종교적 무관심의 원칙을 평화의 기본으로 삼았다. 원래 신성로마제국의 신분들 간의 종교 내전으로 시작되었던 전쟁은 영주에서 발전한 독립군주들의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른바 ‘세속화’, ‘탈마법화’, 더 나아가 국가에 의한 종교의 지배는 근대의 중요한 계기이며, 이것은 ‘근대성’의 확실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지표가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서 형성된 과정을 홉스 정치철학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홉스의 생애에서 두 가지 요소를 주목해 두어야 한다. 우선 그는 청년기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말년에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영역한 고전학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1660년 대의 이른바 ‘홉스-보일 논쟁’에서 철학은 추론의 학문임을 주장하면서 실험철학을 강조한 보일과 대립했으며, 이로 인해 왕립학회에 가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에 관한 홉스의 태도는 인문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국가는 과학에 근거한, 확신에 가득찬, 관용을 허용할 여지가 없는 절대주권의 국가이다. 그는 도덕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시작해서 리바이어던으로 끝을 맺었다. 리바이어던은 이전의 불관용을 제거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관용을 세운다. 이는 역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자가 반드시 관용의 국가에서만 살아가는 법은 아니다.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전제적인 황제의 통치 하에서 살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의주의자들도 절대군주의 통치하에서 살았다. 근대 세계의 혹독하면서도 소외된 국가구조는 또한 회의주의자들에게 적합한 풍경일 수 있으며, 왜 그런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홉스이다.”

“합리적 예측이 위력을 잃을 때 정치는 마술이 된다.”(칼 쇼르스케, <<세기말 비엔나>>) 마술로서의 정치는 대중의 동원과 결단주의 옹호에 의거 “사법적인 예외적 관리 권력”을 정당화한다. “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살육 때문에 합리적 예측 없이도 국가는 리바이어던이 되었고, 정치는 요술(妖術)로 변해버렸다.”(강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