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음 기회에 참석할게요.”
시편 119:33-35 RNKSV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법을 살펴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기쁨을 누릴 길은 이 길뿐입니다.
John 3:20-21 ESV
For everyone who does wicked things hates the light and does not come to the light, lest his works should be exposed. But whoever does what is true comes to the light, so that it may be clearly seen that his works have been carried out in God.
“2차 대전 중에 미국 국방연구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코넌트는 전후 하버드의 교육 개혁을 주도했는데, 개혁의 핵심은 인문학 · 사회학 · 경영학과 같은 비(非)자연과학 전공 대학생에게 자연과학의 ‘전략과 전술’ 즉 과학의 핵심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원폭 개발 이후 미국의 미래가 이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코넌트는 과학사 중심의 교재를 편집하려 했고, 특히 화학을 전공한 자신이 제대로 다루기 힘든 물리학을 쿤이 맡아 주길 원했다. 쿤은 뉴턴의 역학이 과학을 모르는 대학생들에게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고 갈릴레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갈릴레오와 갈릴레오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리학의 차이를 분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s)』을 읽기 시작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지성사학자 쿠아레(Alexandre Koyré)의 『갈릴레오 연구(Études galiléennes)』를 탐독했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문에는 바로 이 시기에 쿤이 한 가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계시’와도 같은 통찰력을 얻은 경험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쿤을 당혹스럽게 했던 문제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 같은 분야에서는 지금 관점으로 보아도 꽤나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학, 특히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멍청해 보이는’ 설명에 만족했다는 것이었다. 물체의 운동 속도가 물체의 무게나 힘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은 갈릴레오와 뉴턴에 의해서 완성된 고전물리학을 배운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make sense)’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던 중에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은 물체의 거리 이동만이 아닌 물체의 상태의 일반적 변화를 의미했고, 따라서 이것이 운동 자체를 물체의 상태로 간주한 갈릴레오의 근대적 운동 개념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운동 개념을 당시의 맥락에서 파악하고 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17세기 갈릴레오의 물리학 사이에는 진화적 발전이나 오류의 교정이 아니라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이나 개념적 틀의 변혁이 존재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1948년 여름에 쿤을 찾아온 깨달음은 과학의 발전이란 누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1948년부터 1962년까지는 쿤이 역사학자로서 입지를 서서히 굳히면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정리하던 시기였다. 당시 쿤의 연구는 주로 철학이 아닌 역사에 집중되었지만, 그 이유는 그가 역사를 충분히 알고 난 다음에, 즉 충분히 ‘성숙한’ 다음에 철학적인 주장을 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가을 쿤은 코넌트의 추천으로 하버드 대학교 펠로 협회(Society of Fellows)의 주니어 펠로(Junior Fellow)로 임명되었으며, 여기서 받는 지원금 덕분에 다른 직장에 들어가지 않고 3년간 독서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동안 쿤은 17세기 청교도주의와 실험과학에 대한 로버트 머튼의 논문을 읽고, 장 피아제의 발달심리학을 공부했으며, 협회의 시니어 펠로였던 콰인(W. Quine)의 유명한 논문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1951)를 읽었다. 그는 또 역사학자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와 쿠아레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과거의 과학적 사건을 현재의 관심이 아니라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고, 과학의 발전이 급격한 변혁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었다. 1950년에 쿤은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해서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메리 헤시(Mary Hesse)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1950~1951년에는 세 편의 물리학, 수학 논문을 출판했으며, 1950년부터 내시(Leonard Nash)와 코넌트의 강의를 물려받아서 교양 과학을 가르쳤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역학의 발전’이라는 과목을 만들어서 강의하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버클리 대학교도 학생들에게 과학의 방법론, 특히 과학적 발견의 방법론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많았다. 특히 당시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이 발사된 뒤에 미국 정부와 대학은 과학적 발견을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을 교육해서 창의적인 과학자들을 키워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버클리 대학교가 쿤을 고용한 것도 부분적으로 이런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쿤은 버클리의 대학원생들에게 물리학 원전들을 읽는 세미나 수업을 진행하면서 오랫동안 구상하던 『과학혁명의 구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버클리와 스탠퍼드의 세미나에서 영감을 얻어 정상과학의 본질이 퍼즐 풀이(puzzle solving)라는 인식을 얻었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과학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찾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후 쿤의 집필은 빨라졌고, 『과학혁명의 구조』는 1962년에 ‘통일된 과학의 국제 백과사전’의 시리즈와 시카고 대학교 출판부에서 독립적으로 출판되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채택될 경우에 과학자들은 기존의 현상을 새로운 언어로 기술하고,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새로운 데이터를 내놓는다. 또 과거에 다루어진 모든 문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이 중에서 잊히는 것이 생긴다. 과거에는 익숙한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것이 되고, 과거에는 중요했던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쿤은 라부아지에(A. L. Lavoisier)에 의한 화학 혁명 이후 화학자들이 물질의 성질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고, 그 관심이 다시 회복되는 데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고, 또 존재한다고 해도 알 수 없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쿤은 과학철학 분야에서의 이런 비판을 수용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서 공약불가능성을 두 패러다임의 언어가 일대일로 번역될 수 없다는 ‘번역불가능성’으로 해석했다. 번역불가능성은 다른 두 패러다임이 자연 종(natural kinds)을 분류하는 서로 다른 분류 체계(taxonomic system)를 가지고 있는 데에서 연유했다. 쿤은 점차 과학철학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이 아니라 과학 이론 사이의 번역불가능성을 규명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정교화 과정에서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 즉 과거의 성취와 미래의 기대를 합리적으로 비교하기 힘들다는 통찰은 서서히 잊혔다.”
“쿤은 영국에서 발전한 과학사회학이 자신의 주장에서 벗어났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이 자신의 핵심 주장을 왜곡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언급들을 종합해 보면, 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지식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을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의 일환으로 생각했고, 이들이 과학의 내용을 더 깊게 천착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사회적 요소를 끌어들여서 과학적 지식의 형성을 사회적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이런 주장을 낳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사회구성주의자들의 평가에 못마땅해했다.”
0.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
1. “문제의 개요는 의외로 간단하다. 비평가이자 소장국문학자 이명원은 박사과정의 공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선배 학자인 김윤식 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일본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표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왜 그런 일이 있었던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는 김윤식이 임화라고 하는 선배학자를 겨냥하여 학적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임화를 극복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동화되어 버렸음을 발견했고, 그 이유를 추궁해본 끝에 김윤식에게는 그 스스로 ‘생리적 감각’이라 부르는 무의식적인 일본에의 향수가 있어 그러한 ‘생리적’ 지향이 그로 하여금 일본학자를 도용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했다.”(노혜경)
2. “<타는 혀>를 시작으로 문학비평의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보여주었던 <해독>, 문학권력과 주례사 비평에 대한 비판, 등단제도와 문학상 논쟁 등을 정리한 <파문:2000년 전후 한국문학 논쟁의 풍경>, 그리고 산문집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등이 그가 쌓아놓은 저작 목록이다. 다니던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스스로 자퇴했다가 학문적 망명처인 성균관대에서 지난 8월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명원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아 오히려 빨리 대학교수가 될 수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말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비평가 김윤식이 문예지에 발표되는 모든 중단편 소설들을 읽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60년대 초반 문단에 나온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현장비평에 대한 김윤식의 이러한 열정은 동시대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일이다. 아마 이후로도 그러하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소설가 박완서의 정확한 지적이 있다.”
“김정호가 순전히 발로 뛰고 눈으로 더듬어 최초의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었듯이 그도 발로 뛰고 눈으로 더듬어 그와 동시대의 우리 문학의 지도를 만들었다. 훗날 후학들이 그가 그린 지도 위에 그가 미처 못 본 아름다운 섬을 추가할 수도, 산맥의 높이가 틀렸다고 정정할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도 이 최초의 지도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업적을 전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읽은 것보다 더 많이, 최소한 그가 읽은 것만큼은 읽어야 한다. 누가 그렇게 많이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읽을 수가 있다고 해도 그가 한 것처럼 따끈따끈할 때 읽으면서 동시대의 증후까지를 읽어내는 일은 미래의 시간 속에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박완서)
“아직도 월평을 쓰고 있는가. 딱하고도 민망하게 살펴보았소. 이쯤 되면 나만의 방도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소. ‘작품과 작가의 구별 원칙’이 그것이오. 이 작가는 누구의 자식이며 어느 골짜기의 물을 마셨는가를 문제 삼지 않기. 있는 것은 오직 작품뿐. 이 속에서 나는 시대의 ‘감수성’을 얻고자 했고, 또 하고 있는 중이외다. 내 ‘자기의식’의 싹이 배양되는 곳. 어째서 그대는 세상 속으로 나와, 작가.현실.역사와 대면하지 않는가.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하면 어떠할까. 그러나 작품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현실의 그것보다 한층 순수하다는 믿음은 갖고 있소이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면, 그 ‘순수성’이란 이런 것이오. 밤이면 모두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담요에 싸여 잠들지만, 따지고 보면 원시 시대의 인간들이 그러했듯 들판에서 땅에 머리를 처박고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가까스로 잠이 든 형국이라고.”(김윤식)
“『뉴레프트리뷰』는 영국에서 1960년 창간되어 격월간으로 출간하고 있고 있으며, 한국어판은 그간 출간된 것들 가운데 우리에게 유의미한 글들을 추려 1년에 한 번 출간하고 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도덕적으로 기껏해야 관용되는데 불과했던 이윤의 추구를 프랭클린은 어째서 직업(소명)으로 생각했는가”를 묻는다. 이 물음은 탐욕으로 간주되던 금전 추구행위가 어떻게 하여 존경받는 행위가 되었는가로 확장할 수 있다.
베버의 물음에 함축되어 있듯이 중세적 사회에서 이윤의 추구는 기피되는 행위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전욕, 권력욕, 색욕을 3대 죄악으로 간주했고, 최소한 인정한 것은 명예욕과 결합한 권력욕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악덕의 본질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고, 악덕에 의한 악덕의 견제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그러했을 뿐이다.
근대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대이고 이러한 파악이 모든 탐구 영역에서 바탕이 된다. … 홉스는 갈릴레이의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 본성을 파악하려 했으며, 그에 따라 «리바이어던»은 국가에 관한 논의 이전에 10개 장을 인간에 관한 논의에 할당한다. 스피노자, 비코, 루소 등도 이러한 논의에 가담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도덕철학과 종교적 교훈만으로는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파괴적 정념에 대처하는 방안들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강제와 억압에 호소하는 것인데 근대에서는 칼빈이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두번째로는 “분열적인 정념을 건설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는 생각”, 즉 정념을 이용하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는 비코에서 선구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새로운 학문» 132절과 1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률이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인간 사회에 유용하도록 고찰하는 것이다. … 지상의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이들 3악[흉포, 탐욕, 야심]으로 사회적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가 사리(私利)에만 몰두해 있다면 야수 못지않은 고립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정념으로부터, 인간적 사회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질서를 창출하는 신성한 입법정신이야말로 신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부론» 3편 4장의 제목은 “도시의 상업은 농촌의 개량에 어떻게 공헌했는가”이다. 이 제목은 분명 상업이 농촌의 개량에 공헌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4장의 한 구절은 이러하다: “상업과 제조업은 [이전에는 인근 주민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상태와 영주들에 대한 노예적인 종속상태에서 살았던] 시골 주민들 사이에 질서와 훌륭한 정치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점차로 도입한다. 이 점은 지금까지 거의 관찰되지 않은 바지만 상업과 제조업의 효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흄은 그것을 주목한 유일한 저자이다.”
“상업과 지식이 없다면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단순한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부르주아가 중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기초인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정념에 의존하고 정념은 경험에 의존한다. 그리고 상업은 인간의 경험, 지식, 가치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흄의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가 1725년에 Political Discourse라는 제목으로 묶어낸 12개의 에세이 중 중심이 되는 것은 “상업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가의 위대함과 그 신민의 행복은 … 일반적으로 상업과의 관련에서 분리될 수가 없다. 사적인 인간이 교역과 부의 소유에 있어 공공의 힘으로부터 더 많은 안전을 얻게 될수록 공공[영역]은 사적인 인간의 풍요로움과 확장된 상업에 비례하여 더 강력해진다. 이러한 공리는 일반적으로 참인 것이다.” 이렇게 흄은 “상업과 정념을, 정치사회의 구축과 능동적이고 활력있는 역사에 기여하는 역동적 힘”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인간 행위의 지배적 동기라는 생각은 가능한 사회질서를 위한 현실적 기초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지적인 흥분은 야기시켰다.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라는 생각은 [플라톤에서와 같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적 국가 모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예측성이다.” 이해관계를 잘 따지는 것은 이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로크의 «통치론»이 옹호하는 부르주아적 합리성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지도적인 철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누르고 좋은 면을 활성화시킨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찬양하였고, 아울러 이렇게 되면 인간 본성의 파괴적이고 불길한 요소를 억누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이러한 태도를 집약한 명제가 바로 ‘온화한 상업(doux-commerce)’론이다. 이 입장의 선구적인 사상가로는 몽테스키외를 거론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상업주의 정신에는 근검절약, 경제성, 온화함, 평정, 지혜, 질서 및 규칙성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이 지배적이면 상업에 의해 창출된 부는 어떠한 부정적 효과도 없다”고 말한다. 몽테스키외의 언급에서 우리는 서두에서 제기된 베버의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조를 가지고 있는 스미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자유로운 사적 이익 추구를 옹호하면서 이해관계와 정념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익 추구에 의해 정치적 위험이나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점 대신에 이것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였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는 “여타의 모든 정념을 재산증식 욕구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로써 “이전의 많은 사상가들이 규명하려고 노력했던, 이해관계가 정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색이 끝나게 되었다. 스미스 이후의 학문적, 정책적 논쟁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할 때 물질적 복리가 향상된다는 스미스의 이론에 대해서만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17~18세기에 상업과 산업에 대한 옹호가 이처럼 강력해진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허쉬먼은 당시 사람들이 “빈번해진 전쟁과 내란 때문에, 종교적 가르침을 대신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엄격히 규율할 새로운 행위 규범을 찾고 있었고, 상업과 산업의 발전이 바로 이런 규범으로 작용하리라고 기대”했다고 본다. 이는 “돈벌이 자체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익한 부수효과가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기대 속에서 “사회적 파멸을 피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자본주의 확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책은 “인간의 충동과 어떤 성향들을 억누르고 좀 더 단순하고 예측가능한 ‘일차원적’ 인간성을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이는 본래의 의도가 충실하게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_ 강유원, 2015.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