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18

June 8, 2018: 3:21 pm: bluemosesErudition

“입을 열기 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꼭 필요한가? 진실한가? 침묵보다 가치 있는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말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사이 바바)

“현명함은 열 가지로 만들어진다. 그 중 아홉 가지는 침묵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간결한 말이다.”(스코틀랜드 속담)

June 6, 2018: 6:49 pm: bluemosesErudition

성화는 죄의 옷을 벗고(최소)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다(최대).

: 4:42 pm: bluemosesErudition

‘빈정 상하다’는 ‘(남이) 빈정(거려서) (마음이) 상하다’는 말을 압축한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다.

: 4:37 pm: bluemosesErudition

“So whatever you wish that others would do to you, do also to them, for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

: 4:32 pm: bluemosesErudition

성마름.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감정적 속임수

: 3:19 pm: bluemosesErudition

94. 식구들이 집을 옮기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오히려 완전한 절망감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친척들이나 지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당해보지 않은 그런 불행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그들은 최대한 이행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단 은행직원들에게 아침을 날라다주었고, 어머니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속옷을 바느질하느라 온 힘을 다 쏟았으며, 여동생은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판매대 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식구들에겐 더이상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를 침대로 데려다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어머니와 여동생이 하던 일을 놓아둔 채 볼과 볼이 맞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앉을 때, 그러다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방을 가리키며 “그레테야, 저기 문 좀 닫고 오거라” 하고 말할 때, 그래서 그레고르가 다시 어둠 속에 있게 될 때면, 등짝의 상처가 새로 생긴 것인 양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시간, 거실에서는 두 여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눈물을 흘리거나, 눈물조차 말라서 식탁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_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역), <변신>, 문학동네, 2005.

: 2:12 am: bluemosesErudition

조실부모한 탓에 가장으로서 어려운 삶을 지탱해나가야 했던 류승완 감독에게 영화는 꿈이었다. 현실이 목을 죌수록 어두운 동시상영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던 류 감독은 구운 오징어 냄새, 사람들의 음침한 표정 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특별한 재능이나 영리함이 있었다기보다는 매 순간 가졌던 절박함이 무기였다”는 그는 여러 차례 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 도전장을 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모든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도 떨어졌다. 주변에서는 포기하라는 말이 들려왔다. 술친구 봉준호 감독이 “제빵사나 하자”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되기로 한 후 그냥 직진만 해왔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고, 영화아카데미도 합격했다. 다른 일을 한다는 상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좌절감이 수시로 엄습했지만 이미 발을 내디딘 이상 그저 묵묵히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비참했고, 실제로 포기하려 했지만, 박찬욱 감독이 건넨 위로의 말 덕택에 영화를 계속할 수 있었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하다.” 그렇게 호기롭게 말했던 박찬욱 감독의 데뷔 시절도 영 신통치 않았다. 그도 영화감독이 되고자 악전고투했다. 영화사를 다니며 보도자료를 쓰고, 영어 자막을 번역했다. 극장에 찾아가 영화를 틀어달라며 영업도 했다. “<현기증>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컨트롤된 영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방송도 하며 겨우겨우 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세월은 그렇게 자꾸 흘러 아이는 자랐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대단한 일을 할 걸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플란다스의 개(봉준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류승완)

June 5, 2018: 3:32 pm: bluemosesErudition

강원 교육청 수평선(수업평가개선) 프로젝트

June 4, 2018: 10:55 am: bluemosesErudition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반딧불이>에 실린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이창동의 ‘버닝’은 미스터리 장르로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끝없이 물음표를 던지지만 이것이 느낌표로, 강력한 입소문으로 번지지는 않은 분위기다.”

: 10:45 am: bluemosesErudition

스탠포드대학교의 심리학자 월터 미셸이 1960, 70년대에 걸쳐 3~5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들의 의지를 시험해 본 간단한 실험입니다. 즉, 마시멜로를 보여주며 지금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고 일러준 뒤, 선생님이 잠깐 어디 다녀오는 10분 동안 저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말을 하고 선생님은 자리를 비웁니다. 실험에 참가한 아이 중에는 10분을 꾹 참고 기다린 아이도 있었고, 반대로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은 아이들도 있었죠. 그런데 미셸 교수 연구팀이 시간이 흘러 실험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살펴봤더니 그 어린 나이에도 굳은 의지를 발휘해 마시멜로에 손을 뻗지 않고 기다렸던 아이들이 학교 성적도 우수하고 똑똑한 학생으로 자랐으며, 나아가 좋은 직장을 얻어 소득도 높더라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마시멜로 실험의 결과였습니다.

뉴욕대학교의 타일러 와츠, UC 어바인의 그레그 던컨, 호아난 쿠엔이 <심리과학>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시멜로에 당장 손을 뻗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아이의 의지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긴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10년, 20년 뒤 인생의 성공을 예견하는 결정적인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특히 아이의 사회경제적 지표를 포함한 가정환경, 부모의 교육 수준 등을 고려하고 나면 미미하게 나타나던 상관관계마저 사라졌습니다.

연구진이 진행한 새로운 실험은 총 900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행했습니다. 마시멜로뿐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을 고를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전체 미국 사회의 환경을 잘 반영하고자 인종, 가정환경 등 요건을 다양하게 반영했고, 900명 가운데 약 500명의 어린이는 어머니가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가정의 어린이로 뽑았습니다. 이는 월터 미셸의 고전 실험과 결정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인데, 미셸은 당시 스탠포드대학교 교직원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마시멜로 실험을 했고, 시간이 흘러 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확인한 사례는 5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미셸의 결론은 숫자가 부족한 표본, 그것도 전체 사회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표본을 바탕으로 도출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대학 교육 이상을 받은 경우,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린 아이들과 바로 집어먹은 아이들에게서 훗날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 또는 학교생활을 잘 하는 학생이 될 확률의 차이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어머니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아이들만 놓고 봐도 가계 소득이나 아이가 세 살 때의 가정환경 등을 고려하면 마시멜로를 언제 먹었는지는 훗날의 성공을 예측하는 지표로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의 의지력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비교했을 때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서 눈앞의 마시멜로를 기다리는 대신 바로 먹어치우는 경향이 더 나타났을까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이런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확실히 보장된 내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의 소득이 변변치 못해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환경을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오늘 끼니를 해결할 음식이 있을 때 이를 가급적 다 먹어치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체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일까지 가면 저 음식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죠. 부모님이 무언가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가 부득이하게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풍족한 가정에서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 아래서 자라는 아이들은 미래를 계획하고 당장의 보상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익숙할 겁니다. 부모님의 소득은 삼시 세끼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설사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뒀던 마시멜로가 어떤 이유로든 사라졌어도 부모님은 더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든 초콜릿이든 기꺼이 사줄 겁니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의 센딜 뮬리네이선 교수가 2013년 펴낸 책 <희소성: 지나친 부족이 의미하는 것>에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단기적인 보상이 집착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옵니다. 이를 마시멜로 실험에 적용해보면, 두 번째 마시멜로가 약속한 대로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눈앞에 있는 마시멜로를 고민할 것 없이 먹어치우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