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시를 쓰는 일은 기도 끝에 남겨진 여죄를 쌓아가는 일만 같습니다. 그것은 저의 무력함과 무관심과 창백함들에 대한 변명이기도 합니다. 제 안에 이런 죄의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가족을 돌아보는 일이 더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수상으로, 그 고통의 우물이 한 바가지쯤은 가벼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상은 제가 받는 것이 아니라, 제 쓰기의 나날들을 지켜주고 보듬어온 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제 딸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랫동안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김구용의 시는 개인을 압사할 만큼 거대하고 단단한 현실 앞에서의 실존적 몸부림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고통이 더해올수록 김구용의 시는 ‘시’의 몸을 뭉개기 시작했고, 이 뭉개진 몸의 흔적들이 ‘중편산문시’라는 형식을 통해 발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뭉개짐은 현실에 압사한 흔적이 아닙니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이어지는, 숨조차 편히 내쉴 수 없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러 자아를 분해하고 해체한 것입니다. 김수영이 하나의 온몸으로 싸웠다면, 김구용은 찢겨진 몸의 수많은 조각들로 싸웠습니다. 시의 몸이 뭉개져 있기 때문에 시의 사지는 엉뚱한 데에 붙어 있고, 때론 피가 분출하고 있고, 때론 싸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김구용의 시는 난해하다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김수영에 의해 붙여진 ‘난해의 장막’이라는 이 딱지는,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현실 대적 방식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둘은 1950년대 시단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김수영이 단 하나의 온몸으로 노래하다 산화했다면, 김구용은 찢겨진 몸을 거름삼아 종국엔 내가 없는 불교의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이 거대하고 불가항력적인 세계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답이 바로 이 두 극단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시는 그 어디쯤에서인가 헤매고 있습니다. 양손에 부끄럽기만 한 두 권의 시집을 들고서 황망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이 수상은 이제 양손을 자르고 더 깊숙이,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라는 따끔한 충고인 것만 같습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시가 써지지 않을 적마다 찾는 책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이상의 소설과 산문이요, 둘째는 김구용 선생의 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쓰는 약력에 ‘김구용’,이라는 이름을 적어놓게 되었습니다. 한 편 한 편 시를 쓰고 약력을 적을 때마다, 이 이름 앞에서 멈칫, 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이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쓰겠습니다. 이 과분한 이름을 약력에 넣도록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십 년이 넘도록 함께 시의 길을 가고 있는 동지들, 부족하고 우매한 저를 거두어주신 인하대학교 은사님들과 동료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더 이상 시를 쓰는 일이 죄가 아니도록, 더욱 이 현실과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김안(2015). 김구용 문학상 수상 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