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본(影印本). 선현들이 남긴 귀중한 자료를 복사해 제본한 책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는 올해 2월 「성서조선」 영인본을 다시 출간했다. 일본강점기인 1927년부터 1942년까지 발행되었던 「성서조선」이 다시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전집간행위원회가 수집·정리한 「성서조선」을 영인하여 CD에 수록하기도 했고, 김교신의 글만 편집하여 전집 형태로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수록했던 자신의 글 일부를 묶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영인본은 「성서조선」 전체를 7권의 책으로 묶었다는 것과, 4,400여 개의 표제어를 수록한 색인집을 따로 펴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색인집은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성서조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가 김교신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성서조선」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한국인 제자 6명(류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양인성, 함석헌)이 동인지 형식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동발행이었지만 1930년 5월부터는 김교신이 주필 자격으로 혼자 발행했다. 이때부터 폐간당할 때까지 「성서조선」은 사실상 김교신의 개인잡지였다. 물론 「성서조선」에는 김교신 이외에 여러 필자들의 글이 실렸다. 앞서 언급한 함석헌이 대표적이고, 그 이외에 송두용 등 다른 동인들과 유영모, 조성지, 이찬갑 등 독자들도 글을 게재했다. 그러나 김교신의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노평구가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글을 묶어 7권의 『김교신 전집』으로 펴낸 것을 보면 김교신과 「성서조선」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김교신에게 「성서조선」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교신 전집』은 한문을 한글로 표기하고 어려운 한자어를 풀어 설명하여, 일반 독자들이 김교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통로가 되고 있다. 『김교신 전집』 이외에도 김교신의 글을 일기, 설교, 수필 등 특정한 주제로 묶은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이처럼 김교신 저술이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김교신은 시간이 갈수록 조명 받는 사람이다. 그동안 김정환, 서정민, 양현혜 등이 쓴 전기가 나왔으며,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다양한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김교신 관련 강연회에는 요즘 기독교계 학술 모임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기현상도 나타난다. 2010년대는 가히 ‘김교신 르네상스’라고 할 정도로 김교신은 많은 연구자와 젊은 기독교인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 주류로부터 배척당했던 김교신이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먼저, 김교신은 일본강점 아래서 끝까지 민족적 지조를 지키다가 수난을 당한 사람이다. 일본강점 말기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부일(附日)의 길을 걸었다. 이에 비해서, 「성서조선」은 시종일관 민족과 성서에 대한 사랑을 결합시키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따라서 「성서조선」은 당국의 감시와 검열을 받아야 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글을 싣지 못하거나 아예 결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십자가 신앙을 견지했던 김교신이 국가유공자가 되어 국립현충원에 영면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든 연결해보려는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둘째, 김교신의 삶과 사상이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이다. 김교신은 ‘복음적 유자(儒者)’였다. 그가 철저한 기독교인이되 또한 철저한 유자라는 독특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 공자를 삶의 모범으로 삼고, 유교적 수신을 통해 공자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사람이다. 유교적 수신과 경전공부를 통해 그는 극히 절제된 삶의 태도, 구도자적 자세, 목숨을 바쳐 공부하려는 각오,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삶을 담보하는 용기 등을 체득했다. 그와 같은 선비적 태도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제자와 지인 등 김교신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술을 통해 그를 뒤늦게 만나는 오늘의 우리도 그의 그런 모습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태도와 가치관은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김교신은 스승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계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한국(민족)적이고 유교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본적으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라는 바탕이 있었지만, 또한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요소가 녹아 있는 독특함이 있었다. 이와 같은 독특함은 ‘한국적 기독교’를 찾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교신은 봄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다. 「성서조선」 폐간과 그와 지인들이 당한 감옥살이의 단초가 된 그의 권두언 “조와(吊蛙)”가 「성서조선」에 게재된 것이 1942년 3월이었다. 또한 그가 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한국인 노무자 복리를 위해 일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한 것이 1945년 4월이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 이후 일흔네 번째 봄을 맞고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1920년 전후의 다섯 해 사이에 태어난 학병세대.
-
“1960-1970년대에 걸친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사람들이나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나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11쪽)
[김교신은] “평교사로 마흔네 살 짧은 삶을 살았고 수백 명 구독자가 있던 잡지를 발간했을 뿐이지만 류달영, 장기려, 이춘갑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육성함으로써 그는 교육자 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120쪽)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에서 좌익이 집권한 적은 없다. 1950년대 후반 한국 근대화의 플랜을 제시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 <사상계> 그룹의 성향은 분명히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 해방 후 제도권 정치의 역사에서 중도 노선 정당조차 살아남은 적이 없다.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의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말하면서 보수 우익 일부에서 틀 지은 ‘좌우 프레임’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념의 스펙트럼은 넓고 우익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은 ‘우익’을 독점하려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좌우 프레임’으로 득을 얻는 이는 누구인지, 따져보아야 할 이유도 이런 역사에 있다.”(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