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 군과 나와의 이러한 기호적 지평 내에서의 만남이 바람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문자로서의 이러한 기호란 너의 것도 아니지만 더구나 나의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신념 때문에 이 자리를 빌려 두 가지 이야기를 해두기로 하였다.
첫째 번 이야기는 출발에 관한 것이다. 출발이란 무릎이다. 무릎의 메타포가 출발인 것이다. K군, 군은 상처 없는 무릎을 보았는가. 우리가 미지를 향할 때 우리가 보다 멀리 손을 뻗치려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일어서려 할 때, 피를 흘려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이 무릎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뜀박질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산과 대지와 강의 흐름과 칸트의 성공(星空, Kants Sternenhimmel)은 사정없이 우리를 막아선다. 그것은 가정이고 네 이웃이고 친구이며 사회이다. 너를 에워싸는 이 감옥에서 너는 탈출해 나와야 한다. 이미 날 때부터 너는 그 탈출의 욕망의 씨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구름 때문에 네가 넋을 잃고 시무룩해 있을 때 아마도 어머니는 너의 건강을 근심할 것이고 심지어 강아지도 네 표정을 살필 것이다. 이 수없는 거미줄 같은 인연의 끈에서 군은 질식해본 적이 없는가. 이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번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너의 무릎을 사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번의 탈출은 보다 아픈 것이다. 그것은 미지를 향한 너의 야생적 본능이다. 내가 목마른 너에게 물을 떠준다면 너는 그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갈증의 욕망을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너의 몸을 눕힐 자리를 내가 만들어준다면 너는 거기서 잘 수가 없으리라. 너는 저 새벽의 광야, 청청한 호수, 태풍 속의 존재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헛된 소유가 아니라 욕망 자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소유도 너를 죽이는 것이다. 안일한 나날보다도 비통한 나날을, 죽음 이외의 휴식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못다 한 욕망이 죽음 후에도 남지나 않을까에 있을 뿐이다.
K군, 이 욕망이 바로 사랑의 의미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다. 설사 내가 아홉 개의 교향곡을 짓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중성자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너는 영원히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오직 너만이 가진 순수 욕망 때문인 것이다. 행위의 선악을 판단하기도 전에 행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열정(passion)이며 아픔인 것이다. 그 아픔이 본능적 욕망의 순수라면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K군, 보이지 않는 무릎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너는 모든 책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너의 골방에서, 거리에서, 도시에서 탈출해가라.
K군, 여기까지가 너에 있어서의 문학이다. 그것은 영혼의 충격이고 모랄이다. 실상 여기까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탕아의 귀가」와 R. M. 릴케의 『말테의 수기』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와 A.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었을 때 가능한 너의 언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언어를 어째서 우리는 서서히 배신하게 되고 말았는가. 어째서 너는 주름살이 늘 때마다 비굴한 몰골과 발맞추어 평범한 사나이가 되고 말았는가. 어쩌자고 행위의 판단 이전에 행위하던 네가 살얼음판을 걷듯 그렇게 움츠리고 말았는가. 폭풍우 속에 놓였던 그 네가 어째서 선량한 아저씨가 되고 복덕방에서 장기나 두면서 백발과 함께 주저앉게 되었는가. 그 감수성과 감각의 비수는 어디로 갔는가.
이 모든 물음에의 해답을 찾는 것은 이미 너에게는 문학이 아니다. K군, 이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문학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고 적어도 군은 말해야 한다. 아홉 개의 교향곡과 <최후의 만찬>과 중성자의 발견에 대해서도 네가 영원히 비웃을 권리를 가졌을 때까지가 문학이라면 그 이상 최고는 없다(non plus ultra). 대체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너의 젊음인 것이다. 그 아픔인 것이다. 현실의 대치물로서 예술이 놓인다면, 그러한 것이 예술이고 문학이라면, 너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평범한 속물로 주름살을 늘이며 사라져야 한다. 베토벤과 미켈란젤로와 오펜하이머를 수용하고 절을 할 때 너의 의미는 없다.
K군, 여기서부터 우리의 회귀의 의미가 시작된다. 살아있는 정신(der lebendiger Geist)이 사라질 때 닥치는 추악함을 견디기 위해 우리가 돌아갈 길에는 파우스트적인 악마의 시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옥이 놓여 있다. 그것은 본능적 욕망의 대가로 지급되는 보편적 아픔이다. 이러한 자기 회로를 비교적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이른바 문화라는 장치이다. 물을 것도 없이 문학도 그러한 장치 중의 하나이다.
K군, 이러한 어리석음과 확실함의 승인 뒤에서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나는 썼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입문서가 아니다. 그 이하이면서 그 이상이다. 물론 군은 아직도 실수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실수가 어떤 비참의 경지에 이를지라도 군은 우리에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선상에 머물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군이 순수했다는 과거적인 사실 자체에서 마침내 달성되리라.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지 아녔더니
눈雪 기약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여세라
촉燭 잡고 가까이 사랑할 제 암향조자 부동터라(『가곡원류』)
_ 김윤식, <한국 근대문학의 이해> 서문 “출발의 의미와 회귀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