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10-digit prime found in consecutive digits of e).com
4. “우주가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현상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법칙이 놀랍도록 다양한 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7. 이 답을 찾은 사람들은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사이트에 접속한 후 이 수열 패스워드를 이용해 다음 페이지로 접속해봅니다. 과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다시 한번 ‘Congratulation!’ 간단한 축하 메세지가 나오면서, 이번에는 구글 채용사이트로 접속이 됩니다. 이 단계까지 통과한 사람들만을 위한 아주 특별한 사이트고요, 자신의 이력서를 제출하면 가벼운 인터뷰만으로 구글에 취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구글은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1만 5000명의 직원을 뽑았는데, 이것은 당시 사용한 채용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8~9. 대부분 우리는 잠시 무언가에 호기심을 느껴 궁금해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바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하던 일에 집중하거나, 체내 에너지의 23퍼센트 이상을 먹어치우는 1.4킬로그램의 폭식꾼 ‘뇌’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뇌를 최소한으로만 쓰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기심, 도전정신 같은 자발적 동기만으로 끝까지 몰두해 해답을 얻거나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건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강력한 특징입니다. 호기심이나 꿈, 재미, 보람 등 다양한 내적 동기. 그리고 명예, 인정, 직위, 인센티브 등 외부에서 부여된 외적 동기. 이런 동기들에 지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천착하는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데 있어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가 잘 균형 잡힌 사람들이 세상을 의미 있게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39. 미국 해병대에는 ‘70퍼센트 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70퍼센트 정도 확신이 들면 95퍼센트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단 의사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라는 겁니다.
45. 누군가를 반대한다고 해서 그 상대편이 리더로 선택되지는 않아요. 대통령은 비전이나 미래를 꿈꾸게 하는 사람이어야지, 다른 사람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내 후보를 정하지는 않지요. 여기에도 뇌과학이 들려주는 삶의 성찰이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기 너무 싫어서, 지금 다니는 회사가 싫어서 그만두는 건 좋은 의사결정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건 괜찮지만, 지금 이게 싫으니까 그만두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대책도 없죠. 그 순간 너무 싫기 때문에 도망치듯 그만두지만, 그 자체가 보상이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107. 결핍된 것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중하는, 운통 거기에만 뇌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결핍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터널 비전’을 갖게 만드니까요.
118. 사회성을 배우는 시기에 놀이의 역할은 너무나도 강력합니다. 그 시기에 제대로 놀지 못하면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5배 이상 증가하며, 심지어 살인을 저지를 위험성은 17배나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어요.
121~122. 조직문화 이론가 해리스 오언은 진짜 의미 있는 아이디어와 정보는 회의가 아니라 커피 타임 때 나온다는 사실을 응용해, 커피 타임과 유사한 형식으로 회의하는 법을 고안했습니다. 이른바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Open Space Technology)’라는 기법인데요, 직원들이 커피를 손에 든 채로 서서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이를 녹음해서 정리한 후에 15분 동안 공유하는 방식의 회의입니다.
154. 과거의 경험과 학습 내용을 가지고 그때그때 삶을 꾸려나가야겠지만, 그중 10~20퍼센트 정도는 새로운 탐색을 하는 삶을 살아보시길 권합니다. 그래야만 예전에는 못했던 일을 시도해볼 수 있고, 새로운 삶이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는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큰 즐거움과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80~90퍼센트 정도는 기존 방법을 적용하더라도, 10~20퍼센트 정도는 방법 탐색의 전략으로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 20퍼센트쯤은 열어두는 삶이 새로고침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겠죠.
160~161. 미국에 연구원으로 처음 유학을 갔을 때 얘기입니다. 첫날 대학교에 서류를 제출하는데, 행정 직우너이 제 이름을 빨간색 펜으로 적는 거예요. …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그날 밤에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불을 켜고 앉아서 하얀색 종이에다가 빨간색으로 제 이름을 썼어요. 그날 저는 비로소 ‘과학자 정재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우리는 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 된다고 믿고 있을까요? 다양한 가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진시황 때 중국에서는 빨간색이 너무나 귀한 색이어서 왕만 쓸 수 있었다는 설입니다. 그래서 왕이 아닌 사람이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왕을 모욕하거나 자신이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해요.
169~170. 타자, 투수, 야수 중에서 어떤 포지션에 있는 선수들이 가장 징크스가 많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정답은 ‘타자’였습니다. 그 다음이 ‘투수’고요, ‘야수’들이 징크스가 가장 적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 세 포지션 중 성공 확률은 타자가 제일 낮습니다. 자신이 성공할 확률이 낮을수록, 선수들은 더 많은 징크스를 만들어냅니다.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수는 강한데 자신이 상황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신이라는 엉뚱한 인과관계를 넣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 결국 징크스나 미신을 믿는 이유는 미래라는 굉장히 통제하기 어렵고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억지로 갖다 붙인, 그래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모든 환경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거나 지속적으로 행운이 따라준다면, 인간은 결코 미신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172. 우리는 제2종 오류(맞는 걸 아니라고 판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제1종 오류(아닌 것을 맞다고 판정하는 오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176~177. 우리 뇌에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습니다. 뇌 전역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이 화학물질은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이라 불리는 뇌 영역에서 아주 흥미로운 역할을 합니다. 바로 무작위적인 패턴 사이에서 어떤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역할이지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뱀을 발견하는 능력, 사막의 모래언덕 사이에서 도마뱀을 찾아내는 능력, 숲속에서 군복 입은 군인을 찾아내는 능력은 이곳에서 비롯됩니다. … 도파민 분비가 적절하면 패턴을 잘 찾을 뿐 아니라 창의적으로 패턴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복잡한 패턴 사이에서 생산적인 무언가를 발견하는 창의적인 예술가 혹은 과학자는 전대상피질의 도파민이 제구실을 잘하는 분들인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곳의 도파민 분비가 지나치면, 무작위적인 패턴에서도 쉽게 특정 패턴을 ‘만들어’ 발견하게 돼요. 예를 들어 코카인이라는 마약은 도파민 상승제 역할을 하는데, 코카인을 섭취하면 없던 패턴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현증 환자처럼 도파민 분비가 과도한 경우에는 환청, 환상, 강박 등 존재하지 낳는 것을 듣거나 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182.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가설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생각에도 크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뭐든지 의신하기만 한다면,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듬지 못할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비상식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귀가 가볍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마음을 열면, 그래서 회의적인 감각을 터럭만큼도 갖추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가치 있는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도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겠기에 말입니다.”(칼 세이건, ‘회의주의자가 짊어진 부담’, 패서디나 강연, 1987)
185. 제가 꿈꾸는 사회는 주요 일간지에서 ‘오늘의 운세’가 사라지는 사회입니다. 오늘의 운세 믿나요? 다들 안 믿으시죠. 그런데 오늘의 운세가 나오면 안 봅니까? 있는데도 안 보시나요? 안 믿지만 보죠. 그것이 비합리의 시작입니다.
195~196. 제가 예전에 헬로키티를 만드는 회사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서 한 임원이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헬로키티가 아시아에서는 굉장히 인기를 끄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기대하는 것만큼 큰 인기를 못 끌고 있다. 왜 동양 아이들은 헬로키티를 좋아하고, 서양 아이들은 덜 좋아하느냐? 동서양 아이들의 뇌가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거냐?” (중략) 헬로키티는 사실 이상한 녀석입니다. 눈은 있는데 입은 없는 고양이죠. … 동양 아이들은 눈에서 감정을 읽기 때문에 눈이 있는 헬로키티에게 공감이나 동일시가 가능합니다. 다만 헬로키티 눈은 항상 중성적이어서 특별히 슬퍼 보이지고, 그렇다고 기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분이 좋으면 헬로키티가 나를 방긋 웃으며 보는 것 같고, 내가 기분이 우울하면 얘도 나를 뚱하게 보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감정 이입이 쉽고 동일시가 잘 돼서 ‘곁에 두고 싶은 캐릭터’일 수 있는 거죠. 반면 서양 아이들이 보기에 헬로키티는 기괴한 캐릭터입니다. 그들에겐 감정을 읽을 만한 실마리인 입이 없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헬로키티의 얼굴이 매우 불완전하다고 여겼을 거예요. 우리로 따지면 ‘눈이 없는 고양이’라고나 할까요? 섬뜩하겠죠? 그래서 곁에 두고 싶거나 동일시가 쉬운 캐릭터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199. 창의적인 사람은 암기를 안 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고 중요한 기술은 몸에 체화하면서 기본적인 것을 훈련을 통해 학습해야, 매우 중요한 순간에 인지적인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는 수학 영재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수준의 문제를 풀 때 뇌 활동이 크게 늘어나지 않습니다. 수학 올림피아드 출제 문제 정도가 나오면 그제야 뇌의 여러 영역이 서로 활발히 신호를 주고 받지요. 반면 평범한 중학생들은 중간고사 수준의 수학 문제만 줘도 뇌에서 불이 납니다.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그 정도 수준의 문제를 푸는데도 많은 인지적 노력이 필요한 거죠. 반면 그들에게 수학 올림피아드 수준 문제를 주면, 뇌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200~20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이 가진 창조성의 근원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것을 ‘은유’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은 호수다’처럼, 전혀 상관없는 것인 눈동자와 호수를 연결하여 새로운 등식을 만들어내는 은유 말입니다. ‘A는 B다’에서, 훌륭한 은유일수록 A와 B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지요.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서로 연결하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창의적인 사람의 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21세기 신경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알아내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 전에 얻은 통찰을 말이지요. …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순간 평소 신경 신호를 주고받지 않던,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뇌의 영역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현상이 벌어지더라는 겁니다. 전두엽과 후두엽이, 측두엽과 두정엽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함께 정보를 처리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나온다는 거죠. 창의성은 전전두엽 같은 가장 고등한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기능이 아니라, 뇌 전체를 두루 사용해야 만들어지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평소 연결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잇는 영역끼리 신호를 주고받고 연결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건 연구자들의 해석입니다만, 추상적인 두 개념을 잇는 일이 그들의 뇌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뮤즈가 우리의 뇌에 영감을 제공할 때, 이렇게 뇌에서는 온 영역들의 파티가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203. 저도 글을 쓸 때 비슷한 원리를 사용합니다. 만약 DNA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면 DNA에 관한 책들은 별로 뒤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학 서적을 뒤적거리죠. 그런데 그곳에서 DNA를 설명할 수 있는 절묘한 예제나 비유를 찾게 되면, 그때부터 글일 저절로 술술 풀립니다. DNA에 관한 책들을 뒤적거린다면, 기존의 글들과 유사한 글이 나오겠지요.
215~217. 러시아 출신 유대인인 미국의 바이러스학자 조너스 소크(Jonas Edward Salk)는 폴리오(polio), 즉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연구자입니다. … 그가 이끄는 프로젝트 팀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애썼지만 도무지 좋은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배낭 하나만 메고 이탈리아 아시시라는 마을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휴가를 온 듯 머리를 비우고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13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성당 안에서 불현듯 백신에 관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것을 종이에 미친 듯이 메모했습니다. 그 길로 미국으로 돌아와서 쥐 실험, 원숭이 실험, 인체 실험까지 연속으로 진행하면서 백신 개발에 성공합니다. 대개 과학자들은 이렇게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자신의 특허를 제약회사에 팔아 엄청난 돈을 버는데, 그는 백신 제작 과정을 전 세계에 무료로 공개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제약회사가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 수 있게 된 거예요. 그 바람에 가격이 아주 싸졌죠. 지금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1달러 이하의 가격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맞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지구상에서 소아마비 환자를 거의 사라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소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소크생물학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ciences)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건축 설계를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루이스 칸에게 맡깁니다. … 그때 소크는 이런 부탁을 합니다. “내가 연구실에서 쉬지 않고 일만 할 때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에서 떠올랐다. 수도원 성당 천장의 높이가 무척 높아 그 안에서 내 사고 공간이 무척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 이름을 딴 연구소의 모든 공간은 천장이 매우 높았으면 좋겠다.” 칸이 그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죠. 1959년에 설립된 소크생물학연구소는 약 700명의 연구원이 일하는 작은 연구소이지만, 여기서 지난 50년간 노벨상 수상자가 12명이나 배출됐습니다. 단숨에 최고의 연구소로 자리 잡은 이곳을 두고 ‘소크연구소는 천장이 높아서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라는 일종의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신화를 신화로 남겨두지 않는 연구자들은 정말로 천장이 높아서 이곳에서 창의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는지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실험 공간을 만들고 천장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한 다음에, 실험참가자들을 데려다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한 문제와 단순히 집중력만 필요한 문제들을 풀게 해봤습니다. 천장의 높이를 달리함에 따라 그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본 거예요. 놀랍게도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단순 문제를 풀 때는 천장의 높이가 가장 낮은 2.4미터였을 때 성과가 가장 높았습니다. 반면, 추상적인 두 개념을 이어야 하거나 어떤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봐야 하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천장의 높이가 가장 높았던 3.3미터에서 가장 좋은 성과가 나왔습니다. 보통 회사의 사무 공간의 천장이 높아도 2,7~3미터 사이인데, 소트연구소는 천장의 높이가 3.3미터가 약간 넘습니다. 천장의 높이가 높을 때 정말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걸 신경건축학 실험으로 알 수 있었던 거죠.
219~220.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독서, 여행, 사람 만나기입니다.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하는, 특히 평생에 거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바로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입니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으시라는 겁니다. 의미 있는 세상과의 충돌,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242. 이제 우리나라도 정답을 찾는 교육이 아니라, 좋은 문제를 정의하는 교육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정해진 답을 남들보다 먼저 찾는 교육이 아니라 나만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더 존중받아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수학적 추론을 가르치고, 틀에 박힌 언어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교육이 곧 사고와 철학 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49. 증강현실이야말로 현실 세계를 이루는 ‘아톰’과 가상 세계를 이루는 ‘비트’를 섞어 부드럽게 상호작용하도록 도와주는 일상몰입 기술의 핵심이지요. 증강현실이 강화된 스마트기기가 앞으로 스마트폰을 대체하고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으로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회사 중 하나가 페이스북입니다. 페이스북은 그동안 비트 세계 안에서 소셜미디어 서비스만 제공했는데, 더 큰 수익을 내려면 애플이나 샤오미, 삼성처럼 스마트기기 자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매년 5000억 원씩 10년간 총 5조 원 이상을 증강현실을 기반으로 한 새 플랫폼에 투자해오고 있습니다.
250. 일상몰입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기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이런 기기가 실혀 가능해지려면, 기기를 사용하는 동안 사용자 주변의 아톰 세계에 대한 정보들을 모두 비트화해서 비트 세계로 보내줘야 합니다. 그래야 도로 위의 장애물 정보를 파악해서 내가 부딪히지 않도록 알려준다거나 다른 사람이 가상 공가에서 나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죠. 이를 위해서는 아톰 세계의 상황을 전부 비트화할 수 있는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이 필수적입니다.
251. 제4차 산업혁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물인터넷을 통해 아톰 세계를 고스란히 비트화해서 비트 세계와 일치시키면 이 빅데이터를 클라우드 시스템 안에 저장해서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아톰 세계에 맞춤형 예측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산업으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제4차 산업혁명을 제안한 세계경제포럼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아톰 세계와 비트 세계가 일치하는 것을 ‘가상 물리 시스템(CPS, Cyber-Physical System)’이라고 불렀습니다.
253. ‘아톰 세계와 비트 세계의 일치를 바탕으로 한 제조업과 유통업의 혁신’이 바로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에는 웨이러블 기기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마트폰 다음에 나올 미디어 플랫폼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는 데도 웨어러블 기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사물인터넷을 이용해 아톰 세계의 정보를 모두 비트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바이오 정보까지도 비트 세계로 옮기려면 웨어러블 기기는 필수적입니다.
261. 지금은 사람들이 ‘제4차 산업혁명’과 함께 사물인터넷이니 인공지능, 빅데이터, 블록체인을 열심히 언급하지만 이런 기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빅데이터 전문가들은 ‘앞으로 미래에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빅데이터 전문가’입니다. 그것은 마치 엑셀 전문가, C언어 전문가와 비슷합니다. 앞으로 많은 대학생들이 일상적으로 C언어나 자바, 파이썬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고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리듯 하둡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해 빅데이터를 관리하고 분석할 겁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 전문가라는 건 ‘워드프로세서 자격증’만큼이나 쓸데없고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될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누구나 사용하기 편리하게 인공지능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가 공유될 텐데, 정말 중요한 건 그걸 이용해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미래를 이끌 겁니다. 바로 여기에 미래의 기회가 있습니다.
262. 이제는 사물인터넷을 통해 사물들끼리 소통이 가능해지게 될 텐데, 우리를 둘러싼 물건들끼리 조합된 ‘경우의 수’는 약 1000만 배 이상 될 겁니다. 예를 들어 독거노인이 하루 종일 냉장고나 수돗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오늘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려보세요’라고 문자를 통보하는 시스템도 가능합니다. 저희 집 체중계가 저희 집 냉장고에게 제 몸무게 정보를 보내서, 저에게만은 밤 10시 이후에 냉장고 문을 안 열어주는 서비스가 생길 수 있겠죠. 주인이 기대할 법한 서비스를 물건들끼리 커뮤니케이션해서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가 만들어내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를 더 많이 이해해서, 내게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겁니다. 스마트 카, 스마트 홈, 더 나아가 스마트 도시로 말이죠.
263. 2014년 아마존이 인공지능 플랫폼 알렉사를 탑재해 출시한 인공지능 스피커 에코의 경우, 처음에는 사용자의 명령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동안 500만 명이 사용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꾸준히 업데이트되어, 이제는 사투리 섞인 영어 발음도 다 알아듣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지요. 시장에 먼저 뛰어든 아마존은 고객들의 데이터로 성장시킨 제품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평정해버렸습니다. 먼저 뛰어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큰 물고기가 강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빠른 물고기가 더 강하다’는 슈밥 회장의 메세지는 의미심장합니다.
268. 기계 번역이 전문번역가를 넘어설 수 있는가 없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글 번역기가 93퍼센트 수준의 정확도만 낼 수 있어도 통번역 일자리 지형도는 완전히 바뀝니다. 그런 세상이 오면, 이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뉴욕 타임스> 웹사이트 모든 기사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7퍼센트 정도의 어색한 문장이 있어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됩니다.
270. 직업이 아니라 작업이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이슈는 과학기술을 잘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기술을 두려워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입니다. 이른바 ‘기술 계급 사회’가 저는 가장 두렵습니다. 데이터 과학자의 일자리는 늘어나고 연봉은 크게 오르겠지만, 단순노무자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연봉 또한 낮아지겠지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기술 관련 직종이지만 사라지는 일자리는 단순 업무라서, 사라진 일자리에 종사한 사람들이 새로 생긴 일자리로 옮겨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없어지는 일자리만큼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많다는 말은 공허합니다.
293~294. ‘테크 이상주의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스튜어트 브랜드입니다.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 캠퍼스)에서 생물학 전공하고 환경운동을 했던 그는 <홀 어스 카달로그 Whole Earth Catalog>라는 잡지를 창간합니다. … 이 잡지에 열광했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1960~7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미국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테크놀로지에 심취핶고, 이들 정신을 통해 히피 정신을 구현해보면 멋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97.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들려준 연설 중에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이 경구는 1974년 잠시 폐간한 <홀 어스 카달로그>의 폐간호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던 문구였습니다. 다시 말해, 잡스는 젊은 시절 그가 히피로부터 얻은 가르침을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려 했던 겁니다. … 애플을 만든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구글의 에릭 슈미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위키피디아의 웨일스. 그들은 모두 <홀 어스 카달로그>의 열렬한 애독자였으며, 히피 정신을 테크놀로지로 구현해보고 싶어 했던 브랜드의 정신적 추종자들이었습니다. 혁명은 이상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열정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
311. 혁명이 오려면 그 아이디어 자체가 너무나도 혁명적으로 아름다워야 합니다. 미숙한 아이디어로는 혁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보어가 양자역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양자역학 아이디어는 크레이지하다.” 그런데 모든 미친 아이디어들이 혁명을 만들진 못합니다. 혁명을 만드는 아이디어는 그저 미친 생각이 아니라 미치도록 아름다운, 그래서 진실에 가까운 아이디어라야 세상을 바꿉니다.
312. 우리에겐 ‘인지적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인지적 유연성이란 ‘상황이 바뀌었을 때 나의 전략을 바꾸는 능력’을 말합니다. 가진 것이 망치뿐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입니다. 내 앞에 놓인 모든 문제를 망치질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죠. 그렇지만 상황이 바뀌고 문제가 바뀔 때 내 연장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인지적 유연성입니다.
313~314. 혁명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오기를 바라는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서 시작됩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혁명을 꿈꾸죠. 그래서 돈키호테도 이런 말을 하죠. “현실은 진실의 적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꿈을 포기하고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미친 것이겠죠.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 보이나요? 아뇨!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것이오! 그중에서도 가장 미친 것은 이상을 외면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오.”
323. 게이츠는 실제로는 위험 감수 성향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지 않고 장기휴학을 했으며, 학교와 부모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휴학도 회사를 창업하고 1년 뒤에 했고요. 자기가 회사를 창업하고 계속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게다가 학교도 나중에 복귀할 수 있는 휴학 상태에서 본격적인 창업을 시작한 겁니다. 게이츠는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위험 감수자로 인용되기보다는 위험을 잘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합니다.
324~325. 과학사회학자들이 ‘지난 100년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노벨상 수상 업적을 처음 생각해낸 시기’를 조사해보았더니, 평균적으로 약 41세였습니다. 화학과 생물학은 좀 더 늦었습니다. 사회적 성취를 이룰법한 혁신, 혹은 창의적 성과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늦게 인생에서 탄생합니다. 다시 말해, 그 분야에 대한 충분한 기간 동안의 학습, 경험,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43. 실리콘밸리에서는 ‘대박을 터트리기까지 평균 4회 가까이 실패한다’는 통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패를 격려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355. 일명 ‘칼 세이건 이펙트(Carl Sagan Effect)’였습니다. 대중적 관계 맺기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의 학문적 성취는 과소평가되거나 폄하되는 효과입니다. 칼 세이건의 학문적 성취는 그의 대중성에 못지않습니다. 뛰어난 학자임에도 학계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칼 세이건. “우리 인간은 모두 별빛을 쏟아냈던 별가루로 만들어진 단일종족이다.”(We are one species. We are star stuff harvesting star light.)
356.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견한 1905년이 아니라 ‘시간과 우주 공간의 상대성,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는 걸 인류 전체가 이해한 순간’이 진정한 인류의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358. “여기에서 말하는 용은 제대로 인간이 되기 전의 모습, 에덴은 인류 최초의 환경을 말하는 거죠. 용이 에덴을 나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되었는가에 관한, 인간 지성 진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365~366.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캠퍼스)에 있는 신경과학자 잭 갤런트 교수의 연구입니다. “fMRI 기계 장치 안에 사람을 눕혀놓고 동영상을 보여줘요. 사람이 동영상을 보는 동안 그의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후두엽 시각피질과 인근 영역을 촬영합니다. 그 데이터를 분석해서 이 사람이 무슨 동영상을 보았는지 뇌 활동만으로 영상을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꿈을 저장하는 상상, 이것은 더 이상 상상에 머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꿈에 관한 연구의 지평을 열 것”이라는 사실에 몇 편의 소설과 영화가 떠오릅니다. 저장된 꿈을 재생할 수 있는 세상은 소설의 그곳처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겠지요. 갤런트 교수는 2016년 4월, 또 하나의 놀라운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고해상도의 fMRI에 사람을 눕히고 이번에는 라디오를 들려주는 겁니다. 소설을 읽어줘요. 말을 듣는 동안 뇌를 계속 모니터링합니다. 가령 ‘그는 칼 세이건의 진정한 팬은 아니었다’라는 문장을 들려줬더니 ‘칼 세이건’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특정 영역이 갑자기 활발한 반응을 보여요. 그렇다면 ‘칼 세이건’이라는 단어가 이 사람에게는 이곳에 저장되어 있다고 간주할 수 있겠죠.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단어가 뇌 어느 곳에 저장되어 있는지 지도를 그려본 거예요.” 조금 상상력을 보태자면, 앞으로 수십 년 후에는 이런 연구를 이용해 쓰거나 타자를 치지 않고도 글을 쓰고, 생각이 바로 글이 되도록 할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단어 지도를 잘 분석해 인간의 사고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도 잇을 겁니다. … 생각만으로 로봇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실험은 또 어떤가요. 앞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움직이는 기계가 등장하리라는 전망도 가능해졌습니다.
367. 지금 기술로도 공포 기억을 지우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예 기억이 저장된 영역을 망가뜨려 기억을 지우기도 하고요. 앞으로는 기억의 원리를 바탕으로 특정 영역의 특정 기억만 정교하게 지울 수 있을 겁니다.
371. 컴퓨터에 넣은 기능은 언어나 수학, 다시 말해 최근 1만 년간 발달한 뇌 기능인데요. 이것은 최신 기능이기 때문에 잘 이해되고 있는 걸 컴퓨터에 놓은 거예요. 그런데 의식과 감정은 진화적으로 몇십만 년 동안 서서히 뇌를 바꿔가며 만든 거라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너무 고등한, 짐작조차 못 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살아생전에 그 기능이 이해돼서 컴퓨터에 들어가는 상황이 온다는 보장이 없어요. 강인공지능이 우리를 위협할 불안 때문에 인공지능 시대를 불안해하는 건 너무 과한 반응 같고요. 오히려 인공지능에게 시키면 웬만한 일은 다 하는 시대에 왜 학교는 우리를 자꾸 인공지능 수준으로 머릿속에 똑같은 것만 넣으려고 하는지, 인공지능에 우리 뇌를 넣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인공지능 대하듯 우리 뇌를 인공지능화하는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377.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 대부분의 회식에 가지 않는다. 술, 담배, 골프도 안 한다. 혼자 빈둥거리면서 노는 시간이 많다. 여럿이 보내는 시간은 계획을 하고 보낸다. 월, 화, 수, 목요일에는 대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연구에 집중한다. 그중 하루는 아무 스케줄 없이 혼자 논문을 읽고 논문을 쓴다. 그리고 금, 토, 일요일 사흘에 세상살이를 한다.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은 사실 가족들과 보낸다. 딸아이 셋의 귀여움이 최고에 달해 있어 그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한없이 좋기 때문이다.
378. 아침잠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생활 패턴을 바꾸었다. 5년 전부터 저녁 10시에 자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새벽 4시쯤 일어난다. 이때부터 아침 9시까지 집중해서 한 가지 일을 한다. 이 시간이 있어서 낮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해도 채워지는 부분이 있다. 이런 시간이 진짜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한 가지 생각만 하는 것도 좋다. 그러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밤늦게 대전에서 서울로 올 때 운전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런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신경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 뇌는 체중의 2퍼센트를 차지하지만 에너지의 23퍼센트를 쓴다. 뇌를 쓴다는 것은 에너지를 많이 쓴다는 얘기다. 따라서 뇌를 쓰는 일은 에너지가 있을 때 해야 한다. 스티븐 코비가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나눠서 하라고 했는데 뇌를 많이 쓰는 일은 뇌에 에너지가 충만할 때 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회사에 가서 신문도 보고 커피도 마시며 아침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퍼져 있을 때 진짜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능률이 오를 수 없다. 하루 중에 뇌의 인지적 에너지가 충만할 때를 판단해서 가장 창조적인 일을 그때 해야 한다.
384. 사실 전 책보다 정말 많은 영감을 주는 게 따로 있어요. 저녁을 먹고 나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캠퍼스를 산책하는 시간이에요. 몽상하기에 좋은 시간이죠. 대전 캠퍼스에서 일을 마치고 목요일 바에 운전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시간 역시 완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이에요. 특히 조용한 밤길을 운전할 때면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제가 쓴 논문 대부분의 단초는 새벽 운전을 할 때 떠오른 거예요. 완전히 혼자 있는 시간, 누군가에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한데, 가족이 있고 사회생활을 하면 그런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죠. … 미국에서 통계 낸 것을 봤더니 [영감을 주는 시간이] 주로 운전 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샤워 시간.
388.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았어요. 아인슈타인은 평생 발표한 논문이 23편입니다. 제가 이미 쓴 논문만도 50편이 넘으니, 논문 개수로만 본다면 아인슈타인은 무능한 과학자죠. 하지만 그의 논문 23편 중 노벨상을 받을 만한 게 6편이래요. 세상에 내놓은 것이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 내놓을 때마다 심사숙고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걸출한 논문을 쓴 거죠. 반면에 피카소는 손대지 않은 미술 장르가 없어요. 그의 작품 수는 4000점이 넘는대요. 하지만 비평가들이 냉정하게 평가해 피카소의 이름에 걸맞은 작품이라고 선정한 건 40점 정도래요. 4000점 중 40점. 1퍼센트밖에 안 돼요. 그런데 그 40점이 아주 훌륭한 거죠. 정리해보면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창조적 업적을 시도하지만 가끔 좋은 게 나오고, 어떤 사람은 심사숙고해서 몇 작품만 내놓지만 그게 다 수작으로 평가받는 거예요. 단순히 결과물만 보고 “저 사람은 천재야. 정말 창의적이야”라고 말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스쳐 지나간 일에서 저 사람은 어떻게 저걸 발견하고 해석했을까’에 중점을 두어야 해요.
392. 아티스트는 상상력을 확장하는 사람이고, 디자이너는 상상력을 구현하는 사람, 그리고 과학자는 상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_ 정재승, <열두 발자국>, 어크로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