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되었다. 포천 지현리 작업실에는 올해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산당화와 자귀나무 꽃이 만개했다. 어머니는 당신과 같이 몇 해를 기다렸던 능소화 봉오리가 올여름에 드디어 맺혔구나, 하신다. 가족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을까’ 생각한다. 그런 순간들마다 아버지가 남시긴 글들이 위안과 길잡이가 된다.

6.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극도로 비정한 삶을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7. 2019년 8월 / 황현산의 아들 / 황일우 삼가 씀

11. 문법 공부는 …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15. 세꼬시에 뼈가 들어가는 것은 사실 부차적 특징이다. 작은 고기를 쓰기에 칼질을 옆으로 하지 않고 수직으로 한다. 뼈가 발리지 않는다. 대신 고기를 짧게 썬다. 세꼬시는 경상도에만 있고 전라도에는 없다고 하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전라도에서는 보통 생선을 칼질해서 미나리, 무 등 채소와 함께 무쳐 먹는다. 경상도에서는 그대로 상 위에 올려놓고 막장 등에 비벼 먹기를 잘 한다.

16. 어머니는 생선 요리를 잘하셨지만 당신은 들지 않으셨다. 목으로 넘어갈 때의 어떤 관능을 죄스럽게 여기셨기 때문이란 걸 내가 늙어갈 때야 알았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17. 금성이 초저녁에 뜨면 거지별 또는 개밥바라기별이고 새벽에 뜨면 샛별이다. 좋은 시인들은 늘 거지별 노릇만 한다. (중략) 시쓰기는 소통하기 어려운 것을 소통하려는 노력이다. 나중에라도 소통되도록 길을 여는 일. … 말을 생산하는 시와 소비하는 시가 있다. 소통 운운하는 것은 대개 말을 소비하는 시인들이다.

17. 복거일씨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만 읽으면 편향된 지식을 얻을 위험이 있다고 했다는데, 별걱정을 다 한다 싶다. 뭐는 안 그런가.

18. 뿌리 뽑기라는 게 얼마나 파시즘적 사고인데. (중략) 제도를 들먹이는 건 정작 중요한 문제를 가리기 위한 술책이다. (중략) 글쓰기 싫으면 번역을 하는데, 해놓은 게 제법 많아졌다. 글쓰기 싫은 것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 번역하기가 글쓰기보다 쉽지는 않지만 제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19. 동양에서 ‘이매’는 산과 숲과 냇물의 귀신 (중략) 글 한 꼭지를 끝냈다. 제목을 뭐라고 붙이나. 자고 나면 생각이 나겠지. 밤이 선생이다.

22. 백석의 <사슴>에 관해 쓴 글. “식민지 귀신의 상실된 영험을 시의 깊이로 채워”

23. “내 생존이 그 연명을 한 시간의 경계 밖으로 밀고나가기는 불가능하다.” (중략) 서울 시장직은 전문가가 할 일이지만 대통령은 바보도 하지 않는가.

24. 한국어의 제1급 사용자답게(이 점에선 겸손이 필요없다) 짧은 글짓기를 한다. (중략)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는 “말을 조각처럼 한다”는 표현이 있다. (중략) 우리집 애들은 다래끼가 나면, 정약용의 처방에 따라, 반대편 발바닥에 天平 두 글자를 써서 그때마다 효과를 보았다.

25. 머리가 굳어진 순수주의자보다 더 끔찍한 것도 드물다. 종교 문제에서도 그렇지만, 언어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어떤 시도를 해도 토론이 불가능하다.

26. 남을 할퀴고 뒤통수치는 식으로 농담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재치라고 생각하겠지만, 재치 부족이고 병이다. 내 선배 중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망했다. (중략) 유치원 첫날, 선생이 말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은 오른손을 드세요. 한 아이가 물었다. 그럼 안 마려워져요? 순진성이 재능을 만든다.

34~35. 나무 주사위는 바깥에서만 묘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영원히 그것의 핵심을 알지 못하게 될 저주를 받았다. 재빨리 둘로 갈라봤다. 그 즉시 그것의 내부가 벽이 되고, 번개처럼 빠르게 신비는 살갖으로 변형된다.

37. 우리 안에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덩어리가 있다는 생각은 끔찍한데, 초현실주의는 그걸 창조의 원천으로 삼기도 했다.

42. 내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일에 여전히 매달려 고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빠뜨린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는 게 이롭다. 독창적인 생각은 대개 그럴 때 얻어진다.

43~44. 글에 ‘……으로 다가온다’나 ‘자리매김한다’가 보이면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 바둑에서 뻔하고 평범한 수를 속수라 하는데, 글에도 그런 속수 비슷한 것이 있다.

45. 1952년 8월 6일의 추억 정리. 1)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물에 넣은 거울에 달이 태극으로 비쳤다. 2) 그날 한반도에 부분 월식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3) 달의 그림자 진 부분이 붉게 보였고 어린 나는 그것을 태극기라고 생각했다. 4) 거울을 물에 넣은 것은 달을 잡아먹는 오랑캐를 그 방식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설화 때문이었다. 5) 그날 밤 일은 책력을 보고 월식을 예견한 마을 어른의 지시였을 것이다.

52~53. 구두점이 필요 없는 언어는 없다. … 서양에서 의문부호를 처음 쓴 것은 4세기경, 감탄부호와 괄호를 쓴 것은 13세기. 현대의 구두점 체계가 완성된 것은 18세기였다. 글을 읽을 때, 사람마다 호흡과 리듬이 다르다. 구두점은 독자의 호흡을 글 쓴 사람의 호흡으로 유도하는 효과를 얻어주기도 한다.

55. 이윤기는 죽기 전 오역 논쟁에 휘말렸다. 그때 이윤기가 말했다. 번역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하지 왜 나를 죽일 놈으로 만들어. 분노를 앞세우지 않고는 비평을 못하는 것은 비평 연습이 돼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63. 박원순은 성소수자들이 소수라는 생각만 했지, 인권의 대원칙이 항상 소수와 만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밑바닥에 깔린 생각이다.

84. 동시대의 명저들이 하나의 생각을 전해준다면, 고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높은 생산성. (중략) “중단과 연속과 해학이 일치하듯이” 꽃이 핀다. 김수영의 말이다.

90. 근대화는 일본의 덕, 해방은 미국의 덕, 경제 성장은 독재의 덕

93. 시의 설명은 우선 시어 하나하나가 무슨 뜻이며, 그것이 어떻게 일상어와 연결되고 어떻게 일상어를 뛰어넘는지를 모두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의 분위기 파악이나 시와 연결될 것 같은 인문학적 이론의 제시 따위로 시에 대한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시를 상세하게 분석하면 시의 기가 죽어버릴 염려가 없지 않다. 하나 그것은 시의 기가 약하거나. 시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를 키울 때 기를 살린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직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기는 저절로 살아난다.

113. 번역자가 실력이 부족하면 의성어 의태어 많이 넣어 아름답게 번역하는 일이 잦다.

118~119. 나는 제자들에게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할 때, 단어 하나하나를 엄격하고 자유롭게 쓰라고 말한다. ‘엄격하게’는 그 뜻과 용법에 맞게라는 뜻, ‘자유롭게’는 인습적 문맥을 벗어나 새로운 문맥, 새로운 문장 환경에서 그 뜻이 완벽하게 발휘되게라는 뜻.

126. 정지용의 <향수>가 트럼블 스티크니의 표절이라는 주장은 90년대에 이미 제기되었다. 정이 미국 시인에게서 착상을 얻었을진 모르지만 표절은 아니다. 19세기 후반 ~ 20세기 전반, 문학에서 고향 상실의 주체는 세계적 추세, 정도 트도 그 추세의 일부일 뿐.

127. 번역은 외국어에 서툰 사람을 위해 대체 텍스트를 만들기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어로 셰익스피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한국어로 셰익스피어를 읽게 하는 일이기 전에 한국어 ‘안’에 셰익스피어가 있게 하는 일이다. 셰익스피어를 번역하기 전과 후의 한국어는 다르다.

148. ‘안 읽어도 다 안다.’ 이게 노망의 시작인 듯. 남 말은 안 듣고 자기 말만 하겠다는 것. 박완서 선생이 했던 말 : “책은 안 읽고 글만 쓰는 것은 토론회에서 자기 말만 하는 것과 같다. 말을 듣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니, 나중엔 광인처럼 혼자 말한다.”

151. 문학의 세계는 다른 존재들의 세계와 같다. … 공익적인 차원에서 문학을 말한다면, 문학은 1) 주체가 타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지, 2) 주체가 타자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문학이 착한 시민을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나쁜 시민을 상투적으로 등장시키는 것도 결코 칭찬할 일이 아니다.

170~171. 문학적 재능을 타고 났으나 삶의 곡절로 실현시키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40이 넘어 등단을 시도하지만 성공하기 어렵고, 성공하더라도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문단 변두리에 머문다. 그중에는 문학이 아닌 다른 글쓰기를 하면 성공할 사람들이 많다.

171.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179.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엘뤼아르의 <자유>를 깎아내리는 글을 보았다.

181. 좋은 작품을 썼는데 인맥이 없어 출판을 못했다, 이런 말은 거짓말이다. 출판사들은 좋은 원고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작품이 너무 훌륭해서 편집자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이런 말은 사실일 수 있다. 한 세기에 한 번 정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182. 신인 선발 심사를 해보면, 심사위원들 입장에선 안타깝고 본인 입장에선 조금 억울하게 생각할 작품이 한 편 내지 두 편 정도 있다. 그러나 심사에 불만을 품는 것은 그 외의 작품을 보낸 사람들이다.

195. 옛날 영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과 양조위의 밀회 장소가 양조위의 무협소설 집필실이라는 점에 주목한 비평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206. 바보는 흉내내고 영리한 자는 훔친다는 엘리엇의 말을 빌려 표절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엘리엇의 레토릭일 뿐이고, 그 내용은 표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207. 남녀 사이에 성적인 것이 끼어들지 않는 관계는 없다. 친밀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이유.

208. 결정한다는 것은 적절한 때에 잔인해지는 기술이라고 앙리 베크가 말했다는데,

218. 내 선배 한 분은 명민하고 매사가 바른 신사였는데, 모든 말을 뒤엎어 이해하고 모든 사람을 비꼬았다. 본인은 그걸 에스프리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보기엔 에스프리의 결핍인 것 같았다. 그 선배는 그 자질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떴다.

231. 글을 잘 쓰는 능력은 말의 어떤 세부나 그 물질성에 들리는 능력일 때도 있다. <레미제라블>을 읽고 위고의 인도주의나 민중주의를 말하는 아이는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퐁텐블로 숲길의 묘사에 매혹되는 아이는 작가가 되거나 되려고 한다.

240. 영어를 몰라도 우리말을 읽고 쓰는 일에 지장이 없다. 그러나 영어를 좀 배우고 나면 어휘의 개념을 이해하고 문장 구조를 파악하는 수준이 가히 혁명적으로 달라진다.

266. 중국에 처음 갔던 1992년, 남경대 출신 조선족 안내원이 중국은 선천적 장애인들을 모두 수술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69. 공부를 잘하는 것은 간단하다. 세상에 어떤 이치가 있다고 믿고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를 바라면 공부 잘한다.

271. “그리고 특히,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릅답다!” - 아름다운 것은 사실 말들의 이 갑작스럽고 우연한 결합이다.

272. 옛날에는 의원을 찾아가서도 쌍화탕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쌍화라는 게 좀 외설스러운 말이기 때문이었다.

278. 강용석을 보고 있으면 절망을 장사하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282. “좋은 대통령은 역사를 만들고 저열한 대통령은 역사책을 바꾼다”는 전우용 선생의 말

289. 고려대학교가 입시에서 논술을 폐지하고 수능 선발 비율을 축소한다고 한다. 오랫동안 논술 출제위원을 맡았던 사람으로 서운한 마음이 크다. 논술과 수능이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운다곤 하지만, 그래도 현재로써는 가장 공평한 선발 방식이다.

301. 강동원과 거창고 동기인 울집 큰애한테 들은 이야기.

302. 무접종 아이가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건 다른 아이가 모두 접종을 하기 때문, 도시에서 불 켜지 않은 차가 운행할 수 있는 건 다른 차들이 모두 불을 켰기 때문, 어버이연합이 그 정도라도 숨쉬고 사는 건 다른 사람들이 민주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전철에서건 민주 사회에서건 무임승차자들이 제일 큰소리를 친다.

303. 중국이 학생들에게 미세먼지를 모두 마시게 해 공기를 정화한다고,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단다.

319. 문단에서 어느 문인이 잘나가면 그건 누가 뒤를 봐줬기 때문이 아니다. … 문학에서도 행운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행운이 올 때 잡을 수 있는 능력이다.

321. 어머니는 생선 요리를 잘했지만 입에 대지 않으셨다. 비린내를 탓했지만, 실은 그게 기분좋은 비린내와 함께 목을 넘어갈 때의 쾌감, 그 쾌감이 불어오는, 섹스를 포함한 온갖 육체적 관능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50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성에 대한 억압은 젠더 권력을 내면화한다.

327. 올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들을 모두 훑어보니 당선자들 가운데 두 사람 정도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운이 좋으면. 전형적인 신춘문예풍을 벗어난 당선작의 숫자가 그 정도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기가 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333. 좋은 시의 기준을 세운 비평가가 시에서 섹스를 팔지 말라고 질타했다. 그런 시가 있나, 잠시 생각해보니 어떤 시를 말하는지 알겠다. 섹스라는 말만 나오면 ‘나는 섹스를 했다’나 ‘나는 섹스를 하고 싶다’로 이해한다면,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339. 방금 M지에서 청탁이 왔는데 곧바로 거절을 했다. 아마도 전화한 분은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 잡지가 오래전에 나한테 크게 실례를 했다. 그러고는 주간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부심을 부렸다. 글 쓰는 모든 사람은 마치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로.

344. 사람들은 랭보가 애로서 시를 썼기에 깔보기도 한다.

384. 빈정거림만큼 한 사회를 황폐하게 하는 것도 없다. 관습에 가려진 깊은 모순을 들추기 위해 잘 짜여진 아이러니가 아니라면 빈정거림은 우리의 정신을 현실에 볼모로 잡아두고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게 한다.

428. 도서출판 삼인에서는 젊은 시인들에게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받아, 선정 출간합니다. 새로운 등단 또는 재등단 제도입니다. (중략) “헝클어진 신발들 틈에서 / 나는 당신의 신발을 한눈에 알아본다”

428. 안과에 갔더니 오타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심한 짝눈이어서 그렇단다. 방치하면 맞춤법까지 잊어먹는다고.

449. “진정한 진보는 원죄에서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449. 초등학교 때 소독약 머큐로크롬이 무슨 일인지 학교에 대량 배당되었다. 교사들은 그 붉은 약을 빨간색 잉크로 썼다.

451. 부모들은 그 비애를 기억한다.

469. 글은 쓰면서 잘 써진다. 일단 쓰는 것이 비결이다.

484. 결국 애가 쓴 시일 뿐인 랭보의 시가 왜 중요하냐고 누가 방금 물었다. 좋은 시는 늘 실패담이다. 그런데 아주 비장하고 순결한 실패담이 랭보의 시다. 그래서 중요하다.

485. 신인들의 작품을 심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 잘나가는 어떤 시인도 이 정도 수준이더라, 이렇게 생각하고 ‘이 정도’로 쓰면 그게 못 쓰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의 이 정도와 그가 본 이 정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어려서부터 자기에게 시의 재능이 있다고 믿어온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 재능이 아까워 늦게까지 시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 결과가 그 재능을 증명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를 읽는 것도 훌륭한 재능이라고 말한다.

487.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자기 글에서 단 한 문장도 상투적인 문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글에서 상투어구는 바둑의 속수와 같다. 속수를 두고 이기는 기사는 없다. (중략) 좋은 작가에게는 상투적 문장이 없다는 말을 이상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오정희 문장은 쉽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있는가. 없다. 이문구는 충청도 사람같이 말하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있는가. 없다. 박완서는 말하듯 썼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있는가. 없다.

491. 시에는 입법자가 없다.

492. 너스레만 가득 널려 있는 시들이 있다. 그런 시가 인기도 있다.

496. 사우나탕의 화장품 냄새가 꼭 조폭 냄새일 것만 같다.

496. “하나가 없으니 모든 것이 없다”는 라마르틴의 시구가 있다.

497. 랭보는 독재자를 가리켜 “황제, 이 해묵은 가려움증”이라고 불렀다.

498. 인문학 번역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임시 텍스트나 대체 텍스트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각이 어떤 언어를 통해 발행하고 전개된 과정을 우리말로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수입하는 것과 번역하는 것의 차이.

498. 원래 우리말에서 ‘씨’가 붙는 말은 다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신분 제도가 무너지면서 이 ‘씨’를 누구에게나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진심으로 높이지는 않으면서 높임말을 쓰게 되면 그 말이 천해진다. 타의에 의한 근대화의 상처는 말이 가장 크게 입었다.

507. “이 삶은 하나의 병원, 환자들은 저마다 침대를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사람은 난로 앞에서 신음하는 편이 나을 것 같고, 저 사람은 창 옆으로 가면 치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파리의 우울>에 나온 이 구절이 자주 트윗에 뜬다.

512. 한 공간에서 발음된 말을 질과 밀도가 다른 공간으로 옮기게 되면 당연히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521. 민중은 좋은 일에서나 나쁜 일에서나 항상 예상 밖에 있다. 꽃은 허공에서 핀다고 했던 김수영의 말이 바로 그 말이다.

522.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상하게 되는 말은 우리의 뿌리 깊은 미신적 사고와 관련이 있다.

524. 게으른 낙관주의를 두 글자로 줄이면 설마가 된다. 설마는 단순한 부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530. 따지다보면 억울한 일이 너무 많아 아예 안 따지는 거예요.

540. 나는 시에 관해 말할 때도, 극단적인 무엇이 있다고 썼다. … ‘극단의 개념’과 ‘극단적인 무엇’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벌써 개념이 되어버린 것과 끝내 개념이 되지 않으려는 것의 차이.

547. 남이 쓰던 변기에도 앉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저분한 짓은 저리도 많이 했을까.

549. 어떤 악당이라도 이분법의 잣대를 쓰면 자신을 도덕적 우월자로 만들고, 또 스스로 그렇게 믿을 수 있다.

550.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을 쓸 때, 보바리 부인의 자살을 묘사하기 위해 스스로 비소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550. 태릉 담터 근처 최근에 문을 연 설렁탕 집에 갔다. 설렁탕에 소금을 넣어도 간이 맞지 않는다. 나중에 보니 소금이 녹지 않고 밑에 깔려 있다. 공장염을 썼거나 싸구려 암염을 쓴 것이다. 이 집 곧 망한다.

561. 태극기는 이상한 국기이다. 왕조 시대가 끝나기 전에 만들어진 기라서 천지 곧 제왕의 세계를 상징하는 음양 팔괘만 그려졌을 뿐, 근대 국가의 이상을 담지 못했다.

564. 어떤 분야를 전공했다고 해서 그 분야에 특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의무를 지닐 뿐이다. 자다가 일어나서도 누가 질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대답해야 할 의무.

593. 문인들의 문재인 지지 선언을 비판하는 이택광 교수의 글을 읽어보니, 그 사람은 허공에 사는 것 같다. 문인들에게는 지도자가 없어야 된다고 하는데, 엄연히 있는 지도자를 없는 것처럼 살다가 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역사가 바로 어제의 일 아닌가.

594. 소설가 김도언 씨가 삼인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

605. 무교동 낙지는 고춧가루보다 마늘로 매운맛을 냈다. 명동 칼국수의 그 유명한 배추겉절이도 마늘로 맛을 냈다.

614. 너무 편하게 살다가 남들처럼 살려면 세상이 갑자기 황당해지니 주장도 황당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616. 염부들은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고 그 소금을 생산한 염전을 알아차린다. 봄 소금, 여름 소금, 가을 소금도 구분한다. … 초여름의 소금을 가장 좋은 소금으로 쳤다.

617. 우리도 영미권처럼 방학중엔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칼럼이 있다.

622. 메밀을 껍질 벗기지 않고 빻은 가루를 막가루라고 하고, 막가루로 뽑은 국수를 막국수라고 한다.

623. ‘식모’도 대접하는 말이었지만 하는 일이 대접받는 일이 아니어서 천칭이 되었다.

626. 한소끔은 양이 아니라 모양을 나타내는 말인데. ‘우유가 한소끔 끓으면’ 이렇게. (중략) 엄지와 검지 끝으로 한번 잡은 양을 … 우리말로는 원래 ‘자밤’이라고 한다.

627. 사람들은 자기 땅에 있는 것을 천시해서. (중략) 능소화의 능 자는 능가할 능이고 소는 하늘 소다. 하늘을 능가하는 꽃. 아마도 마이산을 가본 사람이 이 꽃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631. 교수 앞에 무슨 말이 붙으면 (석좌교수 빼놓고는) 교수가 아니라 강사라는 뜻이다.

635. 나는 2015년 1월 1일 자로 50년 가까이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내가 증오하는 정부에 담뱃세 2천 원을 더 내기 싫어서였다.

639. 북한에서 1950년대에 이미 아라공의 <공산주의자들> 여섯 권이 번역되었고 그게 우리 국립 도서관에도 들어와 있다는 것을 어제야 알았다. 북한은 아라공의 이 소설이 완간되기도 전부터 번역하고 있었단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646. 철이 없기 때문에 그 범죄의 피해는 더 클 수 있다.

648. 말했다. 설명했다, 주장했다…… 같은 말을 언어학에서 전달사라고 한다.

649. 개나 고양이의 죽음이 다른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개나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작별 인사 같은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60. 예술이 지향하는 이상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우면서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쓸모없다는 것은 ‘지금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의 쓸모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