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2007

May 12, 2007: 12:09 am: bluemosesErudition

“자본가와 노동자 양쪽 모두에게 자본주의의 고유한 사회적 생산관계들과 그 효과가 아니라 어떤 외부적 힘들이 이러한 통제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예를 들어 일자리 감소나 파산은 기계 고장, 소비자 선호의 변화, 국제적 경쟁, 모종의 원인에 의한 경제위기 같은 어떤 사건이나 비인격적 힘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최근에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가 현대 자본주의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 종교적인 용어로 이해돼 왔다(Fine & Saad-Filho, 2006).”

“[그에 따르면] 종교는 소외로부터 유래하는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 종교는 비록 사회적 병리현상을 고친다 해도 문제의 심각성을 혼동시키고 진정한 해결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딜레마를 초래할 뿐이다. (중략) “종교는 민중의 아편(the opium of the people)”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즉 노동의 착취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이 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종교가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달래주기만 하여 오히려 모순 자체의 심각성을 흐려 놓거나 진정한 투쟁에 의한 해결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중략) 종교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의해 병들어 가고 있는 사회에 아편처럼 일시적인 진통효과만 가져올 뿐이고 궁극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다(김종서, 2005).”

May 6, 2007: 5:04 am: bluemosesErudition

1969년, 그 해 여름. 두렵고 애틋했다. ‘후회가 남지 않게 당신을 소중히 사랑하겠습니다.’

: 2:39 am: bluemosesErudition

비판적 실재론은 … 본래 의미 그대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마치 지동설처럼 실재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바스카에 따르면 모든 과학은 존재의 성질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고, 세계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해명들의 경쟁은 존재론 차원의 해결을 요구하므로, 존재(론)은 인식(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바스카는 과학이 가능 하려면 과학의 대상, 즉 실재는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바스카는 여기서 실재를, 분화되지 않고 상호 필연적 관련도 없는 원자들로 구성된 폐쇄체계라기 보다는, 일정한 힘을 보유하면서 상호 관련되고 분화된 기제, 관계들로 구성된 개방체계로 개념화한다. 이에 과학의 탐구대상 중 하나인 인과법칙은 실증주의에서처럼 경험적 규칙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칙을 구성하는 ‘실재’하는 구조, 기제, 관계들은 규칙적으로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그것들이 ‘현실’화된다 하더라도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력이 작용하더라도, 사과가 항상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지는 않으며, 떨어질지라도 그것을 누군가가 항상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지주형, 2007).” 

: 12:48 am: bluemosesErudition

“파시즘에 관하여 공부할 때, ‘[자연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문화고 교양이다. 인간이 교양을 쌓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May 4, 2007: 10:12 am: bluemosesErudition

“16세기가 해부학, 17세기가 생리학, 18세기가 병리학의 시대였다면 19세기는 세포, 20세기는 유전체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6세기의 해부학이 몸을 무정형한 액체가 아닌 일정한 형태와 구조를 지닌 실체로 인식한 이래로 탐구의 단위가 이처럼 변하자, 고대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로부터 이어진 4체액설은 설 곳을 잃게 된다. 해부학이 구조와 형태로 된 몸을 확립하자 생리학은 그것을 바탕으로 몸의 기능을 설명했고, 병리학은 질병을 그 구조와 형태의 변화로 파악했다. 이것이 파라켈수스(통보Intimatio, 1527)를 시작으로 베살리우스(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s Corporis Fabrica, 1543)에서 하비(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1628)를 거쳐 모르가니(질병의 원인과 자리에 관한 해부학 연구De sedibus et causis morborum, 1761)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의 흐름이다. 이후 비샤가 조직에서, 비르쇼가 세포에서, [19세기 베르나르가 도입한 생체실험을 바탕으로] 20세기에는 세포 속의 염색체에서 병의 원인을 찾아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근대서양의학의 흐름은 끝없는 환원(reduction)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질병의 자리는 기관-조직-세포-유전체로 점차 하부단위로 옮겨졌다. (중략) 베살리우스 이래로 물질의 질서를 갖춘 실체가 된 몸은 이제 다시 조직과 세포와 분자로 나뉘고 구조와 형태가 아닌 관계와 반응으로 존재하게 된다. (중략) 애초에 시계와 같은 기계장치로 가정한 근대의 몸은 해부학과 생리학 연구를 통해 경직성을 털어내고, 복잡한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화학공장이 되기도 하고, 유연한 세포들의 공동체로 설정되기도 한다.”

: 2:52 am: bluemosesErudition

1. “본질적으로 다툼의 대상인 모든 개념들이 그렇듯이 무엇보다 실재론의 복잡성은 혼동의 결과가 아니다. (중략) 실재론의 개념은 확실히 평가적이다. (중략) 실재론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다툼의 대상이라면 마음과 무관한 객체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태도, 진정 지식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의심하는 회의적 태도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태도는 철저하게 수사학적인 과학관, 즉 지식은 설득과 의견일치의 문제라고 보는 관점에 적합하겠다. (중략) 수사학자들한테 과학은 직업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일치를 획득한 언설들의 통일성있는 네트워크다. [다시 말해,] 과학의 진리를 사실과 실재의 들어맞음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범위의 언설들이 지닌 통일성에 대한 의견일치로 여긴다면, 개념 변화의 정당화도 그것이 실재에 얼마나 더 근접했는지에 토대를 둘 필요는 없어진다. 그보다 과학의 진리는 … 설득과정의 자연스런 결과이며, 잠재적으로 분열적인 언설들은 계속 유입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견일치를 만들어내려는 끊없는 노력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중략) 과학은 진리의 문제라기 보다는 세계 구성의 문제다.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에, 새로운 세계는 옛 세계에서 가져와 건설할 수밖에 없다. 구성이란 언제나 전통이 인정하는 방법에 크게 의존하는 재구성이다(Gross, 2007).”

2. ”[급진적 과학수사학자인] 그로스의 과학수사학은 ‘지식의 민주주의’에 닿아 있다. 그는 과학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상 다른 지식이나 담론과 마찬가지로 설득과 합의에 의해 지식을 구성하므로, 과학수사학은 과학의 이런 성격을 분석하여 과학 지식이 지닌 인식론적 절대 우위, 또는 지식의 특권을 해체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오철우, 2007).”

May 3, 2007: 1:15 am: bluemosesErudition

인식론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실재론에 대해 막연하다.

“‘존재 그 자체’의 탐구라고 하는 존재론의 출발 지평은 근대로 오면서 변화하게 된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이행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도 ‘존재’를 ‘인간을 통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과 무관한 존재라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관한 논의조차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특수한 양식이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파악된다. 근대 이후의 존재 개념이 고/중세의 존재개념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인식’이므로 ‘존재의 경험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존재론은 인식론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칸트의 철학이다. 칸트의 구성설적 인식이론을 보면, 대상의 데이터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을 통해 수용될 때 감각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 경험을 오성의 범주에 의거하여 구성할 때 비로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직관의 형식과 오성의 범주]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요소들이다. 즉, 경험에 앞서서(transzendental) 인식 주관에 주어진 일종의 규정 작용의 법칙들이다. 따라서 주관에 속하는 이 선천적 법칙들이 객관의 경험과 합치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로써 존재론은 선험철학 속으로 해소되어 인식론으로 변질됐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학적 성격이 이렇게 변화됨에 따라 칸트에 있어서 형이상학도 새로이 규정된다. 그것은 인식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삼는 탐구로 규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