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0년 7월
-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이라는 제목은 실은 일본, 근대, 문학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기원이라는 단어에는 꺾쇠 기호가 들어가야 한다. 이 책은 제목이 나타내는 것 같은 ‘문학사’는 아니다. 이 책에서는 ‘문학사’를 비판하기 위해서만 문학사적 자료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또 하나의 ‘문학사’로서 읽혀버린다면,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2. 1988년 3월
- “내가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을 구상한 것은 1975년에서 1976년 말에 이르는 기간에 예일 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가르치던 무렵이다. … 나는 이 시기에 주로 <언어, 수, 화폐>(소쉬르, 괴델, 마르크스)에 관한 이론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 “이 책에서 나는 ‘내면’이나 ‘주체’ 같은 개념을 공격했다. 하지만 내가 부정하는 ‘주체’란 그 주체 형성에 매개되어 있는 근원에 대해 묻는 일 없이 주체의 직접적 현전성 안에서 자족하는 주체일 뿐이다. 구조주의자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모두들 표적으로 삼고 있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란 심리적인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시스템들의 차이가 요구되는 의문이며, 그것은 여행자나 망명자로서 시스템의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시스템에도 속하지 않았던 스피노자, 데카르트에 반대하면서 데카르트에 충실하려 했던 스피노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삼단논법이 아니라 ‘의심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 “1980년대에 일본의 ‘근대 문학’은 결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내면’, ‘의미’, ‘작가 주체’, ‘깊이’ 같은 관념들이 부정되고, 그들에 종속되어 있던 ‘언어’가 해방되었음을 뜻한다. 말을 바꾸면, 근대 문학이 배척했던 장르들, 즉 ‘언어 유희’, ‘패스티시’, ‘로망스’(SF를 포함한다), ‘새타이어’기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 그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외부성을 잃고 단순한 언어의 유희로 변해 자기 완결적이며 폐쇄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말았다.”
3. 1991년 9월
- “문학을 ‘작가’의 ’자기’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반근대적이나 반서양적이라 할지라도 이미 근대 문학의 장치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 “나는 우선 근대 문학의 자명성을 믿게 만드는 기초 조건을 ‘언문일치’의 형태에서 찾으려 했다. 그 이름과는 달리 언문일치는 어떤 구체적인 문(文)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文)이란 단지 내적 관념을 표현하는 투명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에크리튀르의 소거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내적인 주체를 창출해 냄과 동시에 객관적인 대상을 창출해 낸다. 거기에서부터 자기 표현이라든지 사실(주의)과 같은 개념들이 탄생된다.”
-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네이션의 형성에서 언어의 자국어화가 필수적이며, 신문과 소설이 일반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이는 일본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이십 년 후에 헌법이 반포되고 의회가 시작되는 등 정치적, 경제적 제도의 ‘근대화’가 진전되어 있었지만 거기에는 네이션을 형성하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 근대 비판을 근대 문학 비판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나는 계보학적 역행을, 즉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의 한계를 너무 멀리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많은 논자들이 반유태주의의 기원을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시기 속에서 보려는 데 반해, 그것을 19세기 후반 국가 경제의 확립에 보았다. 그즈음 유태인적 경제가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반유태주의가 확산된 것이다. … 근대 문학의 ‘기원’은 그 이전이 아니라 바로 19세기 후반의 시기에 찾아내야만 한다. 그 이전으로 역행하는 것은 근원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이 시기에 일어난 전도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보강하는 것이 된다.”
4. 1995년 12월
- “그 장소는 … 일본 근대 문학을 ‘바깥에서’ 보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근대’나 ‘문학’이나 ‘일본’ 그 자체의 자명성을 괄호 안에 넣을 것을 강요했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 내가 1975년의 미국에서 지내면서 싸워야만 했던 것은 이 두 개의 표상, 즉 일본인의 자기 표상과 서양인의 일본 표상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구상한 ‘장소’는 결국 미국도 일본도 아니고 두 나라 ‘사이’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 “이 책에서 나는 근대의 ‘기원’을 서양 자체에 물어보기보다는 비서양의 ‘서양화’ 과정에서 보려고 했다. …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이 지역(자국)적 언어의 형성을 통해서만 형성된다고 하면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신문과 소설을 들고 있다. 그것들은 그때까지 서로 무관했던 사건, 사람, 대상들을 나란히 열거하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소설’은 네이션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중신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근대 문학’은 국가 기구나 혈연 지연적인 연결 등이 결코 제공하지 않는 ‘상상의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근대적 네이션 스테이트의 형성이 늦어진 독일에서 네이션의 동일성을 줄곧 보장한 것이 독일 문학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5. 1997년 2월
-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찍이 <일본의 사상>에서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세상의 잘난 정치가들은 분명 의기양양하여 말할 것이다. ‘그것은 15년 전의 진부한 민권론이다. 구미 각국에서는 한창 제국주의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변함 없이 민권론을 내세우는 일은 세계의 풍조에 맞지 않는 유행에 뒤쳐진 이론이다’라고. 그렇다, 이것은 이론으로서는 진부하되 실천으로서는 신선하다. 이 정도 명백한 이론은 구미 각국에서는 수십 수백 년 전에 이미 실천되어 그들 나라에서는 이미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 일본에서는 민중들이 싹티운 이론이 번영주의 원로들과 이기적 정치가들한테 짓밟혀 이론만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말로는 극히 진부할지언정 실천으로서는 신선한 것이다. 그러니 실천으로서 신선한 것이 이론으로서는 진부하다는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_ <남은 일년 반>(1900년 판 부록)”
- “내가 의식했던 문제 중의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당시는 1960년대부터 계속되었던 급진적인 정치 운동이 좌절되고, 그 결과 사람들이 ‘문학’으로 향하는 현상이 생기고 있었다. 아니면 ‘내면’으로 향하는 것을 통해 모든 [이데올로기, 즉] 공동 환상으로부터 ‘자립’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한 것은 사실 진보적 포즈를 취한 보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나중에 증명된 바 있다. 나는 그 경향에 반발을 느끼고 있었지만 단순히 ‘정치’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좀더 근본적인 비판이 필요했다. 거기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이 메이지 20년대 때부터 되풀이되어 왔다는 사실이었다. … 메이지 20년대의 근대 문학은 자유 민권 투쟁을 계속하는 대신 그것을 경멸하고 투쟁을 내면적 과격성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사실상 당시의 정치 체제를 긍정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 그것이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기원’으로 거슬로 올라가 비판하려 했던 것은 그러한 ‘문학’, 그러한 ‘내면’, 그러한 ‘근대’였다.”
* “나는 이 책에 씌어 있는 것(언문일치, 풍경의 발견 등)이 근본적으로는 네이션-스테이트 장치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고찰에서 촉발된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은 C-N-S로 수렴되고, 세계공화국으로 지양된다. 근대 국가의 초극을 모색하는 비평가의 모자이크 유희, 공허하다. 다만, 내/외부의 반영이란 관점에서 언문일치를 “에크리튀르의 소거” 내지, 주체와 사실[-주의]의 창출로 해석하는 접근은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