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이 도쿄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지망하게 된 동기에 대해 “외국어(영어)로 훌륭한 문학 저술을 내서 서양인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고 발언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이쓰키, 오이코세(追い付き, 追い越せ)”, 즉 서양을 배워 서양을 극복하자는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 등 메이지 시대 문명개화론자들의 공통 구호였다. 적어도 나쓰메 스스로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학문으로서의 영문학에 입문할 때에도, 그리고 영문학 교수에서 작가로 전신(轉身)할 때에도 그의 발심을 불러일으킨 최대 동인은 서양에 대한 대항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쓰메는 러일 전쟁 후 발표한 평론 「전후 문학계의 추세」(1905. 8.)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과의 사이에 포탄이 오가는 전쟁은 없었지만 ‘물질적, 정신적인 면에서의 평화의 전쟁’은 늘 있어 왔다고 적었다. 서양으로부터 수입한 근대 문명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지킬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서 서양에 의한 정신적인 ‘침식’을 감수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일본은 ‘평화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쓰메가 서양에 대한 정신적 독립이라는 명제와 마주한 것은 이보다 4~5년 전인 영국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런던 유학 중 서양 문명에 대한 대결 의식을 심화하던 나쓰메는 하숙집에 틀어박혀 독서와 집필에 매달렸다. 영국 등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문학 연구는 “피로 피를 씻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그가 도달한 방향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문학론이었다. 그러나 후일 나쓰메 스스로도 이 글을 “기형아의 송장”이라고 인정했듯이, 그의 ‘정신적 독립’을 향한 시도는 영문학 연구를 통해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학문이든, 창작이든 나쓰메에게는 ‘평화의 전쟁’의 일환이었고, 그는 비로소 자국어를 통한 창작을 통해 서양에 대한 정신적 자립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스스로 맹서했네. 무슨 일이 있어도 10년 전과 같은 삶은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지금까지는 나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네.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네. (……) 단지 엄청나게 격변하는 요즈음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만큼 나의 감화를 받고, 내가 얼마만큼 사회적 존재가 되어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살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고 싶다네. (……) 나는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막다른 곳에서 쓰러지려고 하네.”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의 비장한 출사표에 예술과 정치가 모순 없이 공존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일본 근대문학의 효시, 개인의 마음과 일본의 정신, 서정 속 사회, 예술의 정치화와 정치의 심미화, 일제 국민문학의 모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