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喜)과 노여움(怒), 슬픔(哀)과 즐거움(樂) 등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어찌 일찍이 선하지 않았겠는가? 감정으로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으면 어떤 경우든 선하지 않음이 없다. 드러나서 절도에 맞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선하지 않음이 있게 된다(『近思錄』, 「道體」 제38조. “性卽理也. 天下之理, 原其所自, 未有不善. 喜怒哀樂未發, 何嘗不善. 發而中節, 則無往而不善. 發不中節, 然後爲不善.”).
정이천의 위 문장은 원래 『중용』 제1장에 나오는 내용을 수양론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중용』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은 천하의 커다란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중용(中庸)』.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성리학자들은 『중용』을 이어받아 ‘중화에 이르는 일(致中和)’을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중용』에서는 희·노·애·락 등 감정의 발동 여부에 따라 마음을 ‘미발’과 ‘이발’의 국면으로 구분하고, 미발의 ‘중’을 체(體=大本)로, 이발의 ‘화’를 용(用=達道)으로 규정하였다. 성리학적 수양론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을 때에 그 본체인 ‘중’을 존양(存養)하고, 개시되었을 때는 그 ‘용’인 감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