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26th, 2015

November 26, 2015: 11:40 am: bluemosesErudition

기쁨(喜)과 노여움(怒), 슬픔(哀)과 즐거움(樂) 등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어찌 일찍이 선하지 않았겠는가? 감정으로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으면 어떤 경우든 선하지 않음이 없다. 드러나서 절도에 맞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선하지 않음이 있게 된다(『近思錄』, 「道體」 제38조. “性卽理也. 天下之理, 原其所自, 未有不善. 喜怒哀樂未發, 何嘗不善. 發而中節, 則無往而不善. 發不中節, 然後爲不善.”).

정이천의 위 문장은 원래 『중용』 제1장에 나오는 내용을 수양론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중용』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은 천하의 커다란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중용(中庸)』.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성리학자들은 『중용』을 이어받아 ‘중화에 이르는 일(致中和)’을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중용』에서는 희·노·애·락 등 감정의 발동 여부에 따라 마음을 ‘미발’과 ‘이발’의 국면으로 구분하고, 미발의 ‘중’을 체(體=大本)로, 이발의 ‘화’를 용(用=達道)으로 규정하였다. 성리학적 수양론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을 때에 그 본체인 ‘중’을 존양(存養)하고, 개시되었을 때는 그 ‘용’인 감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었다.

: 11:12 am: bluemosesErudition

안회가 공자에게 위(衛)나라 백성들이 독재자의 폭정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도우려 하니 그곳에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자는 안 된다고 했다. 안회가 학식과 예의와 용기 등 모든 것을 갖추어 인격적으로 훌륭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 곧 자기 수양을 했으면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셈이다. 안회는 도대체 무엇을 더 갖추어야 하는가 물었는데 공자는 ‘마음을 굶겨야 한다’고 일러 준다. 심재(心齋)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스스로 심재가 무엇인지 말한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심재니라.

이어서 심재를 실천하여 생기는 결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재를 하면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소아(小我), 현아(現我)가 사라지고 대아(大我), 진아(眞我), 전아(全我)가 등장한다는 뜻이다. 옛날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져 이런 마음가짐이 갖추어진 사람이라야 사회를 위해 일을 하더라도 진정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_『장자』, 제4편 인간세人間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