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권함
“미술 교육이 ‘실기’에 편중된 건 미술 교육이 ‘기술’이라는 기존의 미술관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미술 시간에 초등학생들은 크레파스로 중고생들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런 편중된 교육의 반복이 아이들로 하여금 미술에 대한 편중된 이해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대개의 아이들은 미술 작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 즉 관객이 된다. 미술 교육은 그 사실에 조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미술 교육은 실기가 아니라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안목과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고등학교 정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근사한 풍경인가.”(김규항)
“신적 의지를 기하학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전자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기독교적 윤리학의 전면적 폐기를 시도하는 스피노자주의가 괴테의 기독교적 이교주의의 저변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Einleitung.
Wenn man die Philosophie, sofern sie Prinzipien der Vernunfterkenntnis der Dinge (nicht bloß, wie die Logik, Prinzipien der Form des Denkens überhaupt, ohne Unterschied der Objekte) durch Begriffe enthält, wie gewöhnlich, in die theoretischeund praktische einteilt: so verfährt man ganz recht.
哲學이 (論理學처럼 客體의 구별을 떠나서 단지 思惟 一般의 形式의 原理들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槪念에 의한 事物의 理性的 認識의 原理들을 포함하고 있는 한, 보통 그렇게 하듯이 哲學을 理.論.哲.學.과 實.踐.哲.學.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주 정당한 일이다. (李錫潤 역, 박영사, 1974)
철학이 (논리학처럼 객관들의 구별없이, 한낱 사고 일반의 형식들만을 함유하지 않고) 개념들에 의한 사물들의 이성인식의 원리들을 함유하는 한에서, 철학을 보통 그렇게 하듯이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으로 구분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일이다. (백종현 역, 아카넷, 2009)
“군사비는 그 지역의 번영을 떠받쳤던 지속적인 재정 지원이었다. 755년 투르크-소그드 혼혈인 장군 안록산(소그드식 이름은 Rokhshan)의 반란 직후 당나라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고 실크로드 경제는 무너졌다.”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실크로드: 7개의 도시> 역자 류형식
“By scouring ourselves in the shower every day, we are actually stripping our skin of bacteria that keep us acne- and eczema-free. Unless you’ve just finished a Mud Run, the only places that need daily soaping are your armpits and groin. The rest of your body does fine with a rinse—even after a sweaty work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