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태극당)
“김수영은 1966년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라고 말한 바있다. 나는 차라리 그의 비밀의 상당 부분은 그가 번역을 했건 안 했건 그가 읽은 것 속에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아주 필요하고 긴요한 일이다. 그 작업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산문에 나오는 책·사람 이름의 목록이라도 만들고, 어떻게 그가 그 책이나 사람을 읽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가 자유롭게 접근한 일본어·영어로 씌어진 책에 나는 그만큼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한다. 오래 전에 생트 뵈브는 브왈로를 평하면서, 그는 핀다로스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지만 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쓴 바 있다. 내가 그런 평가의 대상이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김현)
“에릭 로메르는 다른 누벨바그 감독에 비해 훨씬 뒤늦게 알려졌지만 ‘최후의 누벨바그’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가장 지속적으로 누벨바그 영화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60년에 발표한 그의 첫 장편영화 <사자의 신호>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로메르는 동료들이 영화감독으로 전업해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카이에 뒤 시네마>를 지키면서 편집장을 역임했고 서서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로메르의 야심은 18세기 철학자 파스칼, 라브와이예르, 라 로슈푸코 등과 같은 ‘도덕주의자’(Moraliste)의 실천을 영화로 옮기려는 것이다. 프랑스말로 도덕주의자는 도덕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과는 다르다. ‘도덕주의자’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과연 로메르의 영화는 “난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도중 뭘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행동이 아닌 생각을 담은 영화 말이다”라고 말한 언명을 증명하는 바가 있다. 로메르는 식탁에서 등장인물이 파스칼의 철학을 읊는 따위의 사소한 대화장면에서도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영화기법과 정신의 소유자다.”
“작곡가 드보르작은 새로운 곡을 쓸 때마다 ‘하나님과 함께’라는 문구를, 끝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라고 썼습니다. 세바스찬 바흐는 그의 악보의 여백에 쉴 새 없이 ‘SDG(soli deo gloria)’ 혹은 ‘어린 양께 영광을’이라고 썼습니다.”
If my Valentine you won’t be …
If my Valentine you won’t be,
I’ll hang myself on your Christmas tree.
—————————————————- 1956. 2. 14. Cuba, Ernest Hemingway
115~116. ‘시가 무엇이 될 수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로 무엇을 하겠다는 사람도, 자신이 시인임을 자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인으로서의 외연만을 넓히며 사는 이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좋다. 목소리가 작고 타인의 감정에 도통 개입하지 않으며 사소한 일에도 불필요할 정도로 마음을 쓰는 이도 좋아한다. 그가 만약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시로 할 수 없는 일들로 자주 좌절하며, 자기합리화와 도피 끝에 자신의 오래된 고통을 직면하고는 다시 문장 하나를 겨우 건져내는 이가 좋다. 내가 아는 손택수 시인의 모습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하는 그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의 시를 좋게 읽을 때 나는 “고통을 과장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곧잘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등단작을 떠올린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햇빛의 스펙트럼보다 더 너른 빛이 담겨 있던 시.
118~119. 노동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소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 시인들이 구성하는 세계는 간혹 소비되지만 소진되지는 않는다. 이제 자본의 체제 내에서 누구를 고용하지도 않고 스스로 고용되지도 않는 존재는 시인만이 유일하다. 하지만 시를 쓰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노동자가 곧 시인이라는 것, 다시 말해 체제 내의 노동자가 체제 밖의 시를 써야 한다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119~120. 스무살 무렵 부산의 안마시술소에서 현관 보이로,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던 시절, 손님이 뜸한 새벽 시간이면 부산 각지에서 전화를 걸어온 맹인 안마사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낮에는 늦깎이 학생으로 밤에는 학교 수위를 보며 시를 적었다던 일화들 … 이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더 처절했다. 다른 출판사로 이직을 한 그가 ‘기획실장’ ‘편집주간’에 이어 ‘대표이사’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갖고 있을 때 나는 그와 같은 회사에서 막내 직원으로 일했다. 내 눈앞에는 ‘시인 손택수’가 없었다. 대신 노동에 찌든 ‘생활인 손택수’를 자주 목격했다. 그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밥벌이 강의를 쫓아다니고(「빗방울 화석」) , 살림이 어려운 회사를 위해 투자자를 찾아다니느라 동분서주하고(「물 속의 히말라야」), 심지어는 원고가 반려된 필자로부터 ‘밥버러지’ 소리까지 들어가며(「폭포를 삼킨 모기」) 일했다. 그때쯤 그는 불면증과 위장질환 등에 극렬하게 시달렸던 것 같다. 시인과 노동자 사이에서 완벽히 고립된 것처럼 보였는데 누가 보아도 그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
124. 지역별 개화 시기로 계산한 꽃의 속도는 시속 1.2킬로미터 정도이다. 제주에 벚꽃이 피고 보름 정도가 지나면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동네에도 벚꽃이 핀다. 제주와 서울은 직선 거리로 4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봄은 시속 약 1.2킬로미터로 푸른 바다와 흙빛 선연한 남도의 땅을 거쳐 올라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꽃의 속도가 아이들의 걸음 속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125~126. 나는 그가 계속 이 공공의 영역에 머물며 물신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에 서툴렀으면 한다. 그가 정착하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철 지난 사랑이나 함부로 대했던 과거의 시간 같은 것에 기웃거렸으면 한다. 마음 같지도 않고 마음만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 잦았으면 한다. 독선의 끝에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한다. 비굴함을 조금 덜어내는 대신 여지없이 남루가 남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계속 앓으며, 앓는 소리를 받아적은 시를 써주었으면 한다. …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의 시집을 덮으며 나는 다시 에밀 시오랑의 말을 떠올린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 영원이라면 이미 우리의 삶은 영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삶에서 우리는 울지 않으려고 노래를 부를 것이다.
_ 박준, “울지 않으려 부르는 노래”. 손택수의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발문, 2014.
청산가리. ‘사이안화 칼륨(석탄 가스를 정제할 때에, 산화철에 흡수되어 생긴 사이안화물로 만든 물질)’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청산 칼리(靑酸kali)’의 음역어.
“비정상적으로 과도하다(Essentially Pathological)고 생각한다. 학력 집착은 능력을 중시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실력 위주 사회)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다. 실력 위주 사회는 일견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많다. 우선 학력을 두고 군비 경쟁 같은 논리의 끝없는 경쟁이 발생한다.”
“상대가 전함을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에 우리도 전함을 만드는 거다. 상대는 우리 전함을 보고 실제로 전함을 만들고, 그러면 우리는 추가로 전함을 만들어야 하고…. 결국 경쟁이 가속화된다. 한국 부모들은 ‘다른 집 아이가 사교육으로 더 앞서 나갈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만 뒤처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사교육에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이를 본 다른 부모들도 교육에 투자하고, 다들 지지 않으려 점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점이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그다음에 온다. 서로 경쟁하다 보면 결국 더는 버틸 수 없는 시점이 온다. 상대가 겨우 좀 더 버텨서 이기면 자신을 패배자로 여긴다. 자신이나 부모가 충분한 능력(Merit)을 쌓지 못했다며 원망하고 자기혐오(Self-Loathing)에 빠질 개연성이 높다. 능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갔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입시에 실패하면 곧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학벌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아무리 입시 제도를 공정하게 바꾼다 해도 상류층은 결국 자신의 자녀를 경쟁에서 승리하게 할 방법을 찾아내고 만다. 메리토크라시라는 말을 만든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61년 쓴 소설에 이러한 상황이 생생히 담겨 있다.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경쟁한 뒤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실력(Merit)은 타고난 능력과 노력의 합으로, 실력 위주 사회란 이러한 가정 하에서 본인이 갖춘 실력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공부를 잘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면 사회·경제적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실력은 부모의 지위, 정보, 재력 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실력이라고 하기 어렵다. 학벌에 대한 보상이 과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한영 청소년 간 시간 사용 차이는 놀라운 수준을 넘어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 청소년은 영국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많은 시간을 학업 활동에 쏟아붓는다. 군비 경쟁처럼 비합리적인 양의 노력을 소요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 청소년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한다. 그러나 높은 PISA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국가의 경제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과연 그만한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는가, 무엇보다 그렇게 높은 점수를 얻고자 치르는 정신적 비용을 개인과 사회가 과연 감당할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공정한 입시 제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수만이 거머쥘 수 있는 학벌 성취에 모두가 자원을 쏟아붓지 않도록 사회적 보상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대학 서열의 다각화(Multidimensional Status Ordering)를 비롯해 사회적 성취에 이를 수 있는 학벌 외의 다양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