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019

March 19, 2019: 9:48 pm: bluemosesErudition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시를 쓰는 일은 기도 끝에 남겨진 여죄를 쌓아가는 일만 같습니다. 그것은 저의 무력함과 무관심과 창백함들에 대한 변명이기도 합니다. 제 안에 이런 죄의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가족을 돌아보는 일이 더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수상으로, 그 고통의 우물이 한 바가지쯤은 가벼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상은 제가 받는 것이 아니라, 제 쓰기의 나날들을 지켜주고 보듬어온 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제 딸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랫동안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김구용의 시는 개인을 압사할 만큼 거대하고 단단한 현실 앞에서의 실존적 몸부림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고통이 더해올수록 김구용의 시는 ‘시’의 몸을 뭉개기 시작했고, 이 뭉개진 몸의 흔적들이 ‘중편산문시’라는 형식을 통해 발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뭉개짐은 현실에 압사한 흔적이 아닙니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이어지는, 숨조차 편히 내쉴 수 없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러 자아를 분해하고 해체한 것입니다. 김수영이 하나의 온몸으로 싸웠다면, 김구용은 찢겨진 몸의 수많은 조각들로 싸웠습니다. 시의 몸이 뭉개져 있기 때문에 시의 사지는 엉뚱한 데에 붙어 있고, 때론 피가 분출하고 있고, 때론 싸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김구용의 시는 난해하다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김수영에 의해 붙여진 ‘난해의 장막’이라는 이 딱지는,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현실 대적 방식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둘은 1950년대 시단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김수영이 단 하나의 온몸으로 노래하다 산화했다면, 김구용은 찢겨진 몸을 거름삼아 종국엔 내가 없는 불교의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이 거대하고 불가항력적인 세계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답이 바로 이 두 극단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시는 그 어디쯤에서인가 헤매고 있습니다. 양손에 부끄럽기만 한 두 권의 시집을 들고서 황망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이 수상은 이제 양손을 자르고 더 깊숙이,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라는 따끔한 충고인 것만 같습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시가 써지지 않을 적마다 찾는 책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이상의 소설과 산문이요, 둘째는 김구용 선생의 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쓰는 약력에 ‘김구용’,이라는 이름을 적어놓게 되었습니다. 한 편 한 편 시를 쓰고 약력을 적을 때마다, 이 이름 앞에서 멈칫, 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이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쓰겠습니다. 이 과분한 이름을 약력에 넣도록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십 년이 넘도록 함께 시의 길을 가고 있는 동지들, 부족하고 우매한 저를 거두어주신 인하대학교 은사님들과 동료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더 이상 시를 쓰는 일이 죄가 아니도록, 더욱 이 현실과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김안(2015). 김구용 문학상 수상 소감

March 13, 2019: 10:40 pm: bluemosesErudition

“북한은 핵 위험을 제외하면 전략적·경제적 존재감이 없다. 워싱턴 주류 외교안보 엘리트들의 시각에서, 북한과의 수교는 소련 견제 효과를 지녔던 중국과의 수교나 중국 견제와 함께 경제적 유인을 지녔던 베트남과의 수교와 비견할 이득은 없고,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등으로 이어진다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험하게 할 뿐이다.”(이혜정)

March 7, 2019: 11:20 pm: bluemosesErudition

대학신문, 매일경제, 현대시

March 6, 2019: 9:10 pm: bluemosesErudition

경칩. 재의 수요일

March 1, 2019: 2:04 pm: bluemosesErudition

“우리말 성경에서 ‘온유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대답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아나’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고대시대 대답하는 사람이란 종을 의미한다. 주인만이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은 종에게 주어진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을 의미한다.”

: 1:38 pm: bluemosesErudition

“한 권의 사람, 만 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존 웨슬리)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에도 한 권의 책과 한 권의 성서가 있었지요. 그는 성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친구의 소개로 읽게 됩니다. 이집트의 수도사가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들어가 평생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입니다. 그 전기는 자기 안의 욕망을 버리고 더욱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부채질하였지요. 결정적인 것은 바울의 로마서였지요. 무화과나무 밑에서 습관적인 자신의 죄로 씨름하며 울던 그에게 아이들의 노래가 들립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그래서 책상 위에 펼쳐두었던 성경을 집어 들고 읽은 것이 로마서 13:13~14이었어요.”

“오랜 영적 고투 끝에 하나님을 만난 뒤, 영어성경과 헬라어성경을 읽는 동시에 매튜 헨리의 주석을 읽습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주석을 읽었습니다. 훗날 그는 ‘아 홀로 헨리의 성경 주석을 읽고 기도하노라면 시간이 얼마나 달콤하게 흘러가 버리는지 모른다’(델리모어, <조지 휫필드>, 97쪽).

“다양하고도 상반된 입장의 주석을 한꺼번에 봐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경의 세계가 깊고 깊어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이 경우일 것입니다. 다른 학자의 다른 관점을 보면서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청중의 다양성 때문입니다. 신앙적 배경과 입장이 다른 이질적인 청중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 교회인데다가, 그들 각자의 살아온 이력이 다르고, 정치적, 사회 경제적, 문화적 지위에 따라 보는 시각도 제각각입니다. 특정한 한 가지 입장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다양한 시각을 열어주면서도, 공동체의 리더로서 왜 이런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11:53 am: bluemosesErudition

“물론 자기 개방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나 털어놓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각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성령이 고백하게 하고 간증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때에 성령께서는 마음을 여는 열쇠로 말씀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소그룹 안에서 나누는 각자의 말에는 진실과 간절함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옥한흠, 2003: 115)

: 10:43 am: bluemosesErudition

“True Humility is not thinking less of yourself, it’s thinking of yourself less.”(C. S. Lew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