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또 하루를 보냈다. 쉽게 고갈되는 몸과 마음으로 인해 ‘일을 통한 학습(Learning through work)’이 부재한 나에게 혐오와 실망, 그리고 애잔함이 겹친다. 달리기를 시작해야겠다. 모멸에서 형성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부모에게 기생한 부르주아의 육체에 담고 있는, 나약한 서생의 비실거림과 우는소리와 결별하기 위해서라도 달려야겠다.
멍하니 또 하루를 보냈다. 쉽게 고갈되는 몸과 마음으로 인해 ‘일을 통한 학습(Learning through work)’이 부재한 나에게 혐오와 실망, 그리고 애잔함이 겹친다. 달리기를 시작해야겠다. 모멸에서 형성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부모에게 기생한 부르주아의 육체에 담고 있는, 나약한 서생의 비실거림과 우는소리와 결별하기 위해서라도 달려야겠다.
0. 한준상. “중등교육 살리려면, 배움이라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출처 : 신앙세계, 07년 02월호. p.36~41.
1. 2008년도 대학별 입시요강이 나온 지도 한참이 되었다. 어떤 이는 이번 입시요강을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비아냥 거린다. (중략) 교수니, 정치가니, 교사집단이니 뭐니뭐니 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교육과정 개정을 둘러싸고 하는 짓거리들이 하도 기가차서 교육부 부총리가 한 마디 내뱉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과정 개편이 아니라 권력투쟁의 복마전 같다.”
2. 고등학교는 포로수용소도 아니고, 그 누구를 위한 밥터도 아닌데도 저들에게는 한국교육이 그저 그런 류의 한 장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08학년도 대학별 입시요강도 그렇고 교육과정 개편도 그렇고 그 모두가 고등학생들에게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어 놓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학교와 학원 그리고 대학의 이해관계가 삼등분 될 수 밖에 없다는 … 비유일 것이다.
3. 이번 대입안의 특이할 사항은 논술고사가 드디어 대학 본고사로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수능, 내신, 논술이라는 세 시험과목 중에서 논술의 위상을 점검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수능성적은 등급으로만 활용된다. 학생부의 실질반영률은 기대 이상으로 높을 수가 없다. 그 상황 아래 내신 성적이 비슷한 학생들이 유명 대학에 지원한다. 피가 튀기는 경쟁의 장면들은 불가피하다. 논술시험에서 1점이라도 더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당락은 논술고사 성적이 가름하기에 대학은 논술시험의 변별력을 높여야만 한다. 그래서 논술은 시험내용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학생선발 과정상 본고사이어야 한다.
4. 덕분에 논술 사교육 시장이 성시를 이룬다. 외국기업들이 그 틈새 시장을 노리며 최대의 수익을 올린다. 코스닥 상장 기업인 논술 전문업체가 세계적 투자신탁기업인 JP모건으로부터 수십억원의 투자를 지원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논술 사교육비가 서민의 가계를 더욱 압박한다는 뜻이다.
5. 한국의 사교육, 그 중에서도 입시훈련 전담 사교육 현장에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교육정책이 어떻게 흔들리던 그러한 변화를 성장의 기회로 삼을 뿐이다. 교육정책이 입시훈련 정책으로 집중되고 있는 한 입시훈련 사교육 기관은 영원할 수 밖에 없을 성 싶다. 이것이 우리 한국 초중등 교육의 성장을 보여주는 가능성과 한계의 모든 것이다.
6. 학생들은 특정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에 삼수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입학시험 탈락자가 많을수록 명문학원이요, 그런 학원일수록 … 등록금은 올라간다. 그들은 이렇게 교육적이지 않은 행위마저도 교육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경쟁을 통해야만 학생들의 실력이 높아진다는 논리에 교육당국도, 학부모도, 학생도 아무런 반기를 들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학교가 학생들에게 해오던 그 일들을 똑같이 학원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7. 학교와 학원 교육 모두 정부의 입시위주 교육정책에서 갈라져 나온 이웃 줄기이다. 이 두 기관은 교육행정기관과 함께 교육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또 스스로 그럴듯한 해답을 내놓는다. 교육기관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 채 입시정책만 바꾸는 것으로 교육 문제가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정책들이 낳은 부작용으로 인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버릴 뿐이다.
8. 공교육과 사교육 그리고 복잡한 대학입시안과 교육의 문제들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복잡하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간단히 그 매듭을 … 잘라냈듯이 이 입시훈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언들 또한 복잡할 필요가 없다. 교육이란 결국 배움을 위한 과정이자 결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교육기관의 목적은 잘 배우고, 잘 배워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육기관의 목적이 이 두 가지 행위를 벗어난 적은 없다. 결국 교육의 문제는 배움의 철학과 실행으로 풀어내야 한다.
9. 배움의 철학과 실행에 맞춘 교육적 제언은 몇 가지 갈래로 집약될 수 있다. 그 첫째는 학생들에게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삶에 있어서 배움이 필요한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중략) 교실 현장에 소개되고 있는 수많은 입시훈련용 교수학습기법들이나 그것을 부추기는 학습심리이론들을 아무리 활용해도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만들기는 힘들다. (중략) 배움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이 나열되는 방법과 수단의 열거는 아이들을 지치게 만들고 교사들을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10. 둘째로 교사가 먼저 배우고, 먼저 익히고, 먼저 배움의 철학을 가져야만 한다. 그[교사]들이 배울만 하다고 생각했을 때 저[학생]들은 배우기 시작하는 것인데, 배울만 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루에 10분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생길 리 없다.
11. 물론 학교환경이나 교육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의 전문성 문제 역시 빼놓을 수 없지만, 우선 다급한대로 교사문제가 더 시급할 뿐이다. 저[학교환경이나 교육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의 조력없이도 교실교육은 흘러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교사가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왕이 되고 여왕이 된다.
12. 한국의 교육문제는 서로 얽혀 있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구분하기도 힘들다. 교육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이 단단하고 복잡한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의 원형인 바로 ‘배움’이다. 배움에로의 복귀가 한국교육을 살리는 원리이다.
위 글을 읽고 난 후, 비통했다. 서두에 보도자료를 A4 절반 가량 그대로 옮겨놓은 ‘표절’과, 적잖은 비문과 오타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제기와 대안제시의 연관성 결여 등 교육사회학에 갓 입문한 학부생 수준의 글이었다. 끝내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순환논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경쟁의 비교육적 성격과 풍토를 지적하고 훈계할 뿐, 체계적 원인분석과 근거제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구조적 문제를 행위의 차원에서 무마하려는 자원론 혹은 주의주의로의 환원은 차치하더라도, ‘왜’ 배워야 하는 지에 대한 깨우침을 강조하면서 배움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의 결여로 인해, 결국 저자의 주장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살아 가면서, 배움의 쓸모를 고려할 때 보다 괜찮게 (decently) 살기 위해선] ‘배워야 하고’ ‘배울 수 밖에 없기에’ ‘더 잘 배워야 한다’는 동어반복식 자가당착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저자는 “배움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이 나열되는 방법과 수단의 열거는 아이들을 지치게 만들고 교사들을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면서도, 교실수업의 교육내용을 당위로 전제하고 다시금 ‘어떻게’의 차원에서 교사의 질적 제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는 교육문제에 배태된 ‘게임의 규칙’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고, 기존의 교육내용을 교사의 견인을 통해 학생들이 더 잘 배우게 함으로써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과연 학생들이 배움에 열정을 갖고 자발적으로 공부한다면, 입시에서 파생되는 한국교육의 병폐는 치유되는가. 이해할 수 없다.
* 알렉산더가 ‘고리디우스[혹은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은 것은 ‘게임의 규칙’에 함몰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개방체계를 폐쇄체계로 치환하여, ‘본질’ 추구라는 미명 하에 체계의 구성요소인 제도적 기관들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더욱 졸라 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