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에도 감독관이 졌다. 나는 자정까지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했다. 미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고교과정을 마친 것이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잘 안 된다, 돈이 없다, 그런 자기 위안 따위 허락할 수 없었다.” “선생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도 시간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절 위해 팀을 꾸려 이 제품을 만들어주세요.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2. “귀국 뒤 1년 6개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 길을 한번 정하면 바꾸기 힘들다. 우왕좌왕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라. 그러면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이 한 생각을 돛대 삼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난 개별 상품 대신 인프라를 택하기로 했다. 이익은 적을지 모르나 생명력은 확실히 길다.” “100번의 노크(100 Knocks), 무엇이든 골이 빠개지게 생각한다.”

3. “83년(26세)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 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법’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

4.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해졌다.”

* “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