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1일 오후 4시 29분, 우리의 오늘은 드디어 영화 <백 투 더 퓨처(1989)>가 묘사한 미래를 따라잡았습니다. 마티 맥플라이와 에멧 브라운 박사가 타임머신을 타고 도달한 미래는 똑같은 힐 밸리 마을이되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과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차들이 날아다니고 공중부양판(hoverboard)이 돌아다니며, 무엇보다 놀랍게도, 시카고 컵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지요.”
“2015년 10월 21일 오후 4시 29분, 우리의 오늘은 드디어 영화 <백 투 더 퓨처(1989)>가 묘사한 미래를 따라잡았습니다. 마티 맥플라이와 에멧 브라운 박사가 타임머신을 타고 도달한 미래는 똑같은 힐 밸리 마을이되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과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차들이 날아다니고 공중부양판(hoverboard)이 돌아다니며, 무엇보다 놀랍게도, 시카고 컵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지요.”
Do not submit again to a yoke of slavery
Hosea 8:2-3 ESV _ To me they cry, “My God, we—Israel—know you.” Israel has spurned the good; the enemy shall pursue him.
Galatians 5:1 ESV _ For freedom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refore, and do not submit again to a yoke of slavery.
“이 중세적 질서 원리가 붕괴되고 17~18세기경부터 본격적인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 국가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신분과 직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보편 교회(普遍敎會)의 권위와 전통은 약화되었고, 인간의 이성은 해방되었다. 그런데 신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인간 이성의 해방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 본능의 해방, 인간 감성의 해방까지를 결과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특히 종래 익숙해 있던 중세적 사회관에서 볼 때에는, 이성은 물론 본능과 감성까지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할 때 과연 그 사회에 질서와 화평,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본능의 해방은 이기심 혹은 자애심(self-love)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과연 이기적인 인간들이 자기의 욕구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때 그들이 모인 사회에 질서와 발전이 보장될 수 있겠는가, 만일 보장된다고 한다면 그 근거 내지 원리는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의 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부: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제2부: 윤리학(ethics)
제3부: 법학(jurisprudence)
제4부: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당시를 풍미하던 영국의 경험론은 독일의 관념론과는 달리 원리적으로 볼 때 ‘인간과 자연은 동일하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영국의 철학에는 ‘인성’, ‘인간적 자연’을 뜻하는 human nature라는 용어가 대단히 많이 나온다. 환원하면 인간의 형태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연으로서의 인간 파악이다. 즉 자연의 일부 혹은 자연의 연장으로서의 인간관이다. 독일 관념론과는 달리 여기서 자연과 인간은 결코 대립과 분열의 관계가 아니었다.”
“사적 욕망의 자유로운 추구가 가능해진 개인들이 모여서 자유의 체계를 형성할 때 과연 사회는 질서와 조화,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가? 그 원리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 속에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당시 영국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첫째는 케임브리지의 플라톤 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서, 그들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사회 질서 원리를 개인의 ‘이성’에서 찾으려고 했다. 둘째 흐름은 섀프츠베리(Shaftesbury)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학파로서 모든 개인에 내재하는 상식적인 ‘도덕 감각(moral sense)’에서 사회 질서 원리를 찾으려 했다. 즉 인간은 이성적, 이론적 판단을 경과하지 않고도, 직감적으로 선한 행위를 선으로 감지하는 도덕 감각이 있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와 조화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스미스의 스승인 허치슨(Francis Hutcheson)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의 기초 내지 내용은 인애가 아니라, 계층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감(同感, sympathy)의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감정론』의 서두에서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해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 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해 있다. …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동감이란 자기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환언하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imaginary change of situation) 능력을 전제한다. 따라서 타인의 슬픔뿐 아니라 기쁨에 대해서도 동감의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연민(pity)과는 다르다.”
“스미스의 견해에 의하면, 이타적 행위뿐만 아니라 이기적 행위, 즉 자애심(自愛心)에 기초한 행위도 제3자의 동감을 얻어 낼 수 있다면 행위의 적정성, 즉 도덕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공평한 관찰자가 자신도 동일한 입장이었다면 같은 행위를 할 것이라고 동감할 수 있는 행위라면, 그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 되고, 그 행위의 동기가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감의 원리에 기초한 정의의 미덕(virtue of justice)만으로는, 즉 중립적 관찰자가 동감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이기심을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사회 유지에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서 논리적 필연으로서 애덤 스미스는 정의의 법(law of justice)의 필요를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도덕감정론』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별개의 논문에서 법과 통치의 일반 원리에 대하여 논하려 한다. 또 그러한 일반 원리가 상이한 사회 및 시대에서 어떻게 변혁되어 나타나는가도 논하려 한다. 단순히 정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정치, 국가 수입, 군비 등 법의 대상(object of law)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시민사회는 과연 정의의 법만 잘 지켜지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 정부가 공권력에 의해 정의의 법의 실현만 확보한다면 사회는 스스로 질서, 조화 속에서 발전, 성장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스미스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자유 사회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정의의 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상공업의 발달을 구체적 내용으로 하는 치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에 『법학 강의』가 제1부 정의 편(on justice)으로 끝나지 않고 제2부 치정 편(on police)을 두게 된 이유가 있다. 여기에 제2부 치정 편이 뒤에 『국부론』이라는 단행본으로 독립․발전되어, 국부(國富)의 성질 및 원인에 대해 스미스가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소이(所以)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스미스적 자유방임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덤 스미스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질서정책론자(秩序政策論者, Ordnungspolitikust)’라 하겠다.”
“『도덕감정론』에서 전개한 ‘동감의 원리’와 『국부론』에서 전개한 ‘교환의 원리’=‘경쟁의 원리’=‘시장의 원리’가 실은 동일한 논리 구조 위에 서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원리 ― 동감의 원리와 교환의 원리 ― 가 모두 인간의 이기적 충동을 사회적 선으로 전환하는 역할 내지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기적 충동을 중립적 제3자 혹은 공정한 관찰자의 동감을 얻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제하도록 만드는 동감의 원리가, 그대로 이기심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원리가 된다.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행동의 동기에 있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한 중립적 제3자의 동감이 성립하는지의 여부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동물류에서 각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 독립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그가 만약 그들 자신의 자애심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오, 라고 …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해야 한다.” _ 애덤 스미스, 김수행 옮김, 『국부론(상)』(비봉출판사, 2003), 12~13쪽
Like a heated oven, Like a dove
Hosea 7:4, 11 ESV
They are all adulterers; they are like a heated oven whose baker ceases to stir the fire, from the kneading of the dough until it is leavened.
Ephraim is like a dove, silly and without sense, calling to Egypt, going to Assyria.
Hosea 6:4-6 ESV
What shall I do with you, O Ephraim? What shall I do with you, O Judah? Your love is like a morning cloud, like the dew that goes early away. Therefore I have hewn them by the prophets; I have slain them by the words of my mouth, and my judgment goes forth as the light. For I desire steadfast love and not sacrifice, the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2013년 유네스코는 마르크스의 육필 원고 두 편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했다. 『공산당 선언』과 『자본』 제1권의 원고”
“그의 인식 방법은 완성된 교의가 아니라 계속되는 연구를 위한 정거장이며 그 연구를 위한 방법이다.”(MEW Bd.39: 428)
“자본주의의 본질은 잉여 가치의 생산이다. 우리는 노동자의 전체 노동 시간이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과 이 잉여 가치(자본 수익)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총 노동 시간은 생산된 가치의 크기를 나타내고 임금과 잉여 가치는 생산된 가치가 개미와 베짱이에게 분배되는 소득의 가치 크기를 나타낸다. 그런데 소득 가운데 임금은 대부분이 소비되지만 잉여 가치는 일부만 소비되고 나머지는 다시 자본으로 재투자된다. 이것을 축적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는 잉여 가치를 최대한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 체제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기업의 목표가 ‘이윤 최대화’라는 점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잉여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임금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비정규 노동을 늘리고 해고를 쉽게 하고 임금 피크제를 도입하는 등의 온갖 노력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생산이 소비에 비해 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더구나 그 격차를 최대한으로 늘리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소비되지 않는 생산은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이 격차 때문에 생산력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공황이다. 마르크스는 1847년과 1857년 공황을 보고 그것이 바로 이런 자본주의 생산력의 한계라는 것을 자신의 경제 이론으로 정립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생산력의 이런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공황의 원인이 바로 잉여 가치, 즉 추가적인 노동 시간에 있고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줄여 생산력이 소비 능력과 균형을 맞추는 데에 열쇠가 있다고 보았다.”
“자유의 나라는 궁핍과 합목적성 때문에 강제로 수행되는 노동이 멈출 때 비로소 시작된다. … 노동일의 단축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다.”(『자본』제3권, 1095쪽)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견해에 따르면, 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 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에 걸쳐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우리(stahlhartes Gehäuse)로 만들어 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그 쇠우리에서 ― 영구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 사라져 버렸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을 웃으면서 상속한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마침내 빛이 바래 가고 있는 듯하며, 또한 ‘직업 의무(Berufspflicht)’ 사상도 옛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이 되어 우리 삶을 배회하고 있다. ‘직업 수행(Berufs-erfüllungpflicht)’이 최고의 정신적 문화 가치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질 수 없는 경우 ― 혹은 역으로 말하자면 직업 수행을 심지어 주관적으로도 단순히 경제적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 ― 현대인들은 대개 직업 수행이 지니는 의미의 해석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 종교적 · 윤리적 의미를 박탈당한 영리 추구 행위는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미국에서 오늘날, 드물지 않게 그것에 직접적으로 스포츠적 특성을 각인하는 순수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에 누가 저 쇠우리 안에서 살게 될는지,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는지 혹은 옛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게 될는지, 아니면 — 둘 다 아니라면 — 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될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의 인간들’에게는 물론 다음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 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365~367)
* 자발적 금욕에서 금욕의 강압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외투는 쇠우리로 변질된다. 여기가 마르크스를 소환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