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2nd, 2017

July 2, 2017: 6:45 pm: bluemosesErudition

“어떤 것을 긍정하는가 하면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것을 긍정하여 두 개를 동시에 세운다.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표어인 ‘민족사회주의’에만 해도 특정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와 노동자를 중심에 둔 사회주의가 뒤엉켜 있다. 심하게 말해 파시즘은 그때그때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거의 즉흥적으로 가져다가 이리저리 짜 맞추면서 형성된, 그래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항상 변화하는 역동적인 이데올로기이거니와, 바로 이것이 파시즘을 명료하게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런 잡탕 덩어리가 전간기 서구에서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지배층, 지배기구의 구성원, 피지배집단(이들의 참여를 감안하면 ‘피지배’ 라는 말을 붙이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을 규정할 때에는 치밀하게 적극적인 대중동원과 열광적이고 긍정적인 대중참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이는 파시즘이 참여 민주주의적으로 작동했다는 판단도 가능케 한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념체계 실현에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실행과정 역시 명료한 파악을 저해하면서 동시에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밀고 나간 인간 군상의 심성구조 이해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는 요소다.”

: 4:43 pm: bluemosesErudition

여러 집단을 아우르는 더 큰 도덕 “깊은 실용주의”(조슈아 그린)

: 4:28 pm: bluemosesErudition

“Paul, an apostle — not from men nor through man, but through Jesus Christ and God the Father, who raised him from the dead”(Galatians 1:1) _ Saul became Paul after receiving the gospel of grace.

: 2:56 pm: bluemosesErudition

불안이 해소될 때까지 살펴 장악한다. 이것이 나의 시험공부였고, 업무방식이다.

: 2:29 pm: bluemosesErudition

“A Sky Full of Stars”(Cold Play)

: 3:49 am: bluemosesErudition

노천명이 ‘사슴’이라 칭했던 그는 김일성과 동년배이다.

: 1:08 am: bluemosesErudition

1.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4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로써 정궁 경복궁에 이어 이궁 창덕궁인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리하여 많은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거처하면서 함께 거처하는 식구들도 늘게 되었다. 따라서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세종대왕이 상왕 아버지 태종을 위해서 지은 곳)이라는 곳에 몇 개의 건물을 더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된다. 일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는 창덕궁을 재건하게 된다. 이는 경복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다시 지어져서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고 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

2.
조선 후기의 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와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고종대에 왕이 궁궐을 옮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894년 국내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이를 핑계 삼아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 달도 못 되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이른바 갑오경장을 실시하게 하는 등 계속 우리나라에 압력을 가하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일본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3.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 12:46 am: bluemosesErudition

“I am a flower quickly fading / Here today and gone tomorrow / A wave tossed in the ocean / A vapor in the wind / Still you hear me when I’m calling / Lord, you catch me when I’m falling / And you’ve told me who I am / I am yours”(Casting Crowns)

: 12:42 am: bluemosesErudition

“I cannot get over / Neither have I wings to fly / Give me a boat that can carry two / And both shall row, my love and I”(Karla Bonoff)

: 12:17 am: bluemosesErudition

The time to listen to Aleandro Baldi’s Passer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