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24th, 2017

July 24, 2017: 11:26 pm: bluemosesErudition

여름마저 위선에 쌓여 / 부끄러움을 잃었다 // 수치가 싫어 비워낸 수치를 / 그에게 준다 // 죄가 없어 / 부끄러움을 독려하는 벗에게

: 6:29 pm: bluemosesErudition

증명서 영문 표기

: 11:09 am: bluemosesErudition

동근원성. 진화의 고갱이.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는 그저 대립일 뿐입니다.”

: 10:22 am: bluemosesErudition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ss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The bird fights its way out of the egg. The egg is the world. Who would be born must first destroy a world. The bird flies to God. That God’s name is Abraxas.”

“The bird struggles out of the egg. The egg is the world. Whoever wants to be born must destroy a world. The bird flies to God. The god is called Abraxas.” _ 구글번역, 2017. 7. 25.

: 12:58 am: bluemosesErudition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12:44 am: bluemosesErudition

고전문학자 조동일이 <한국소설의 이론>에서 말한 소설의 기준을 소개했다. 서양에서 중세의 로망스(romance)와 근대의 노블(novel)을 나누듯, 우리도 소설과 소설 이전에 있었던 설화로 나눌 수 있는데 이때 설화는 이야기의 구조에 따라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뉜다. 설화는 ‘자아’와 자아를 둘러싼 환경인 ‘세계’의 대결을 그리는데 그중에서 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협력관계로 가면서 특정한 목적을 이룬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자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 그를 도와주는 주몽 신화와 오디세우스 신화가 그 예다. 이와 달리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세계가 이기고 자아가 결국 실패해서 죽고 ‘그 자리에 나무가 자랐다’더라 등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민담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자아를 그린다. 영웅이 이겨서 공주를 구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소설과 설화는 어떻게 다를까? 소설에서는 자아와 세계가 팽팽하게 싸운다. 결국 마지막에 자아가 패배하지만 그럼에도 자아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여전히 옳다고 믿으며 세계가 틀렸다고 생각하며 끝난다. 그러므로 ‘지는데 사실은 이기는 것’이 소설이다. 신 교수는 “결국 주인공이 지는데 주인공이 그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소설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소설이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요소는 아이러니다. ‘져도 진 것이 아닌’ 태도를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그리스 희곡에는 두 인물의 유형으로 에이런(Eiron)과 알라존(Alazon)이 등장한다. 허풍으로 상대방을 속여 목적을 달성하는 알라존도 평범과 나약함을 가장한 에이런에게는 당해내지 못한다. 에이런은 알라존보다 약한 존재처럼 그려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에이런의 말과 행동양식에서 아이러니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신 교수는 소설의 결말이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멜랑콜리(melancholy)를 직역하면 ‘검은 담즙’입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즙이 있습니다. 그중 검은 것을 멜랑콜리라고 부릅니다. 원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검은 담즙이 많은 사람은 우울한 성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즐거운데 늘 혼자 우울하게 있는 사람이죠.” 소설의 두 번째 요소는 멜랑콜리다.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를 정신의학적으로 접근했다. 사람들이 상실을 경험할 때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애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울이다. 상실을 받아들인 뒤 애도를 마치고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 전자의 태도다. 잔인하게 말하면 ‘마음속으로 애도의 대상을 한 번 더 죽이고’ 현실에 복귀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이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애도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상실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온 에너지를 자신에게 쏟는 사람이다. 이것이 우울증의 양상이고 ‘멜랑콜릭’ 상태다. 우울에 빠진 사람은 떠난 사람과 나의 운명이 분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정의에 의하면 우울은 병이다. 하지만 이것을 윤리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슬픔은 포기하는 것인데 우울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울을 병으로 볼 수 있지만 문학의 관점에서 우울은 슬픔보다 더 윤리적일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사람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 12:32 am: bluemosesErudition

1976

2002 _ 김수영 시에 나타난 ‘사랑’과 ‘죽음’의 의미 연구

2005 _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2008 _ 몰락의 에티카

2011 _ 느낌의 공동체

2012 _ 이상(李箱) 문학의 역사철학적 연구

2014 _ 정확한 사랑의 실험

2017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