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니묄러의 고백과 침묵을 기억하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 숟가락을 부딪히며 저녁을 먹자
_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 2005.
진리의 벗(진리와 벗하자)
_ 암흑 속에서도 빛을 찾으면 온갖 난관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서있는 토대가 흐릿할 때 불안하여 위축되는데, 바로 그 순간 진리를 찾아 동무 삼으면 두려움이 점차 평강으로 변한다. 언제나 옳은 길로 우리를 이끄는 진리는 깊고 넓어 평생을 배우고 익혀도 다함이 없다.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I loafe and invite my soul,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My tongue, every atom of my blood, form’d from this soil, this air,
Born here of parents born here from parents the same, and their parents the same,
I, now thirty-seven years old in perfect health begin,
Hoping to cease not till death.
* Walt Whitman(1819∼1892), “Song of Myself 1″, <Leaves of Grass>, 1855.
“어리석은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바보의 어원은 ‘밥보’이다. 우리 조상들은 밥 먹는 일, 즉 몸 잘되는 욕심에만 집중하는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고 한 것이다.”(이기동)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이 ‘주민의 상당 부분을 세상사에 무관심한 농촌 생활에서 떼어내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농촌 환경에 대해 도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경멸 — 뿐만 아니라 무지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재미있는 이 독일어 구절 dem Idiotismus des Landlebens entrissen을 실제로 분석해보면 Idiotismus는 ‘우매함’이 아니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좁은 시야’나 ‘더 넓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어 idiotes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 것인데, 이 단어로부터 현재 쓰이는 idiot나 idiocy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자신의 사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더 넓은 공동체의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 1840년대 이후 몇 십년이 지나면서 — 그리고 마르크스와는 달리 구성원들이 고전에 대한 교양이 없던 운동 속에서 — 본래의 의미는 증발되었고 오독이 일어났다.”(Eric Hobsbawm)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in my name, there am I among them.”
“몸을 움직이며 생각하는 사람에게 ADHD 약을 처방하고 꾸짖어선 안 된다. 댄서 학교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질리언 린Gilian Lynne은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을 안무할 수 있었다.”(Ken Robi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