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September, 2019

September 16, 2019: 3:05 am: bluemosesErudition

6. “이 책은 마가복음 1장 15절을 청년 청중과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언어로 풀어쓴 강해 설교서다.”(김회권)

15~16. 예수님을 가장 잘 기록한 문서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남긴 네 권의 복음서가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고급 정보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것인 마가복음입니다. 마태와 누가 두 사람은 이미 기록된 마가복음을 읽고 마가복음에 있는 많은 자료를 그대로 가져와 약간씩 고쳐서 자신의 복음서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서로의 복음서를 읽은 흔적은 없습니다. 요한은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다 기록되고 한참 뒤에, 가장 늦게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두드러지지요. 요한도 마가복음을 읽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지상에 사셨던 때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쓰인 굉장히 중요한 문서입니다. 이 마가복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바로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1장 15절(새번역)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34~36. 주전 150년경, 마카비우스 형제가 시리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났습니다. 마카비우스 형제의 게릴라전으로 시리아의 용맹한 장군들이 있는 대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여깁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을 탈환해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여 ‘수전절’(하누카)이라는 절기가 생겼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부림절과 이 수전절을 세 개의 중요한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나라도 곧 다시 시리아에 무너지고, 주전 63년이 되면 패권이 또 바뀌어서 로마가 시리아를 정복합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로마의 권력자가 바뀌면서 이스라엘 역사도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 지리멸렬한 역사 속에서 헤롯 대왕이 등장합니다. 헤롯 대왕은 친로마주의자로, 강대국을 등에 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함께 얽혀 들어갑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는데 헤롯 대왕은 안토니우스를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한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지하던 사람이 아니라 그 경쟁자가 황제에 오른 상황이 되자 그는 로마까지 찾아갑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황제 앞에서 왕관을 내려놓고 “소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왕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속국의 왕이 로마까지 찾아와서 왕관을 내놓으며 잘못했다고 하는 데 감동한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에게 염려 말고 돌아가라며 다시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로마주의자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대통령만 되면 자꾸 미국에 가는 걸 볼 때마다 헤롯 대왕이 떠오릅니다. 로마 황제의 인가를 받고 돌아온 헤롯은 권력기관을 마련하고 피의 숙청을 시작합니다. 아내, 장모, 동서, 다른 왕족,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모든 사람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고혈을 짜서 건축과 토목 사업을 일으킵니다. 황제 신상과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등 로마식 건축물들을 세우고 빌립보 같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볼 수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헤롯 대왕이 만든 것입니다. 잔인한 헤롯 대왕은 주전 4년,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때쯤 여리고에서 죽임을 당하고, 유대 영토는 헤롯의 세 아들인 아켈라오와 빌립과 안디바가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갔습니다. 그나마 있던 나라는 세 개로 쪼개지고, 로마에 붙은 권력자들은 돈을 벌고, 종교 지도자들은 힘 있는 자들에게 붙어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며 자기 배만 불리고, 가난한 민중은 더욱 가난에 찌들어갔습니다. 암울하기 그지없던 그 때,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49~50. 내가 아는 놀라우신 내 주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주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하며 바보가 될 때, 내가 성장합니다. 열심히 성경공부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공부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바를 세속 생활에서 표현할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92~93. 1974년,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오노다 히로’라는 일본 군인이 발견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22살의 젊은 장교였던 그는 필리핀의 루방 섬에 파견되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그의 수하에 있던 모든 부하가 투항했지만 그는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 숨어 지내는 동안 그는 민간인과 필리핀 정찰대를 자그만치 30여 명이나 살해했습니다. 패전을 알리는 여러 전단과 통로를 접했지만 그는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드디어 그의 직속상관이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투항 명령서를 건넸습니다. 그 투항 명령서를 받고서야 그는 29년 만에 루방 섬에서 나왔습니다.

96. 헬라어 원문의 “가까이 왔다”는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단어입니다. … 이 단어는 ‘엥기조’(engizo)라는 헬라어 단어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여기서도 문법이 중요합니다. ‘엥기조’는 ‘가깝다, 가까이 오다, 가까워지다’라는 단어인데 현재완료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일까요, 아주 가까이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97.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지금 곧 임하였다’는 뜻과 ‘이제 곧 임할 것이다’라는 두 개념이 공존합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103.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할 때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보았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106~107.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구조로 인한 종말론적 시간관이 그의 신학에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대가 흘러오다가 하나님이 개입하신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이 구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학교에서 퇴근하면서 두툼한 성경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담대하게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자 이 교수님이 씩 웃으며 답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따르면 있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따르면 지금 그냥 진행 중이지.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 따르면 아직 못 받은 게 확실하네.” 그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과 미래에 완성될 구원 사이에서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구원 부분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얼마나 단순하고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를 보는 역사의식이자, 시대를 보는 눈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벽한 구원은 남아 있고, 우리의 구원은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111.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대부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근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계속 무시하면 어느 단계부터는 우리 안의 성령님이 침묵하십니다. 불이 꺼지듯이 성령이 소멸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얘기했습니다(살전 5:19). 중간 시대인 지금은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품이 변화되는 성령의 열매,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은사,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령의 비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결국 성령님이 근심하시다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112. 교회와 성령, 이 둘은 중간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함께 속해서 같이 살아갈 공동체인 교회와, 우리를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이끌어가시는 성령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142. 예수님의 주 관심사는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내 주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그런 나에 대한 관심에서 예수님의 관심으로 눈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151. “아, 그거 말입니까? 사실은 나도 그냥 한번 흉내 내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내가 잘못한 죄를 대신 뒤집어쓰셨 거든요.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이 잘못한 걸 내가 뒤집어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래서 그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일도 잘하고 성실한데 이번에 크게 실수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놔두면 당신이 파면당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뒤집어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52. 회개는 울고불고 슬퍼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서 우릴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깊이 묵상하면서 내 중심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수련회에 참석하고 수없이 많은 기도회에 가서 울었지만 변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셨다면, 우리의 변화는 감정적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변화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중에 중요한 것이 예수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우리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153~154. 저는 16장 8절에서 끝나는 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뒷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덧붙인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16장 8절 이후가 없습니다. 9~20절 내용이 길든 짧든 붙어 있는 사본은 모두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학자가 마가복음 원본에는 16장 8절까지만 있었으리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25~3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56.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존경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회개해야 할 영역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내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늘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되셔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세 번째 회개입니다.

156~157. 나에게는 어떤 회개가 필요합니까? 첫째, 나에게 꽂혀 있던 나의 주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으로 바뀌는 회개입니다. 둘째, 세상 방식대로 맺었던 인간관계를 예수님의 방식으로 새롭게 맺는 회개입니다. 셋째, 참으로 매력적이고 존경할 만한 예수님이지만 단순히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며 또는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분을 예배하는 자로, 경배하는 자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생활해 나가면서 삶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됩니다.

200.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201. 믿음은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믿는 것입니다.

208.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223. 교회가 지원해 주지 않아 2년 정도 지나면서 청년부는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저는 껍데기밖에 없는 교회에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선교단체 간사가 되어서 5년간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5년 동안 사역하고 나니까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캠퍼스에서 4년 동안 한 사람을 변화시켜봤자 졸업하고 나가면 너무 많이 넘어지고 살아남는 사람은 얼마 없었던 것입니다. 선교단체는 지역 교회가 아니니까 졸업한 사람들을 지역 교회로 보내야 하는데, 보내면 다 죽어버렸습니다. 고민이었습니다. 지역 교회에 절망했고, 학생 운동의 한계를 봤으니까요. 그렇게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224~225. 예수님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과 놀라운 비전과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침에 일어나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예수님이 최우선 순위가 되기를 바랍니다.

229. 하나님을 조작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절대로 조작당하지 않으십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232. 그 옛날에 돌을 자를 때는, 돌의 결을 따라 한 치 깊이의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마른 참나무 못을 박았습니다. 그 위에 물을 부으면 참나무 못이 팽창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바위가 쩍 갈라집니다. …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_ 김형국, <청년아 때가 찼다>, 죠이선교회, 2012.

: 2:43 am: bluemosesErudition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수학적이고 뇌과학적인 방법을 써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수많은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 제가 이 분야에 매료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특정한 의사결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실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의사결정 문제들을 실험실 상황에서 행동과제를 통해 연구하고, 그 행동 이면에 있는 인지적, 생물학적 기반을 알아내기 위해 계산모델링(computational modeling)이나 뇌영상기법(neuroimaging) 등을 이용합니다.”

September 11, 2019: 9:06 pm: bluemosesErudition

7. 직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바로 경험과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다. 현대 뇌과학에서 학습은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고리(시냅스)에서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자주 보고, 듣고, 경험하는 정보를 저장하는 세포들 간의 연결성이 강화되어, 비슷한 정보를 받아들일 때 활성화될 확률이 높아진다.

10. 알파고의 핵심은 딥러닝이지만, 딥러닝은 인간의 뇌를 모방했다.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진 기계는 여전히 우리 머리 안에 있는 1.5킬로그램짜리 뇌다. 알파고는 컴퓨터 1,200대의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지만, 이세돌 9단의 뇌는 하루 20와트 정도의 에너지만 소비한다. 하루 한 끼 든든히 먹으면 된다. 더구나 이세돌 9단은 단 세 번의 대국을 통해 알파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기계학습에서 이야기하는 ‘원샷 학습법one-shot learning’이다. 어린아이는 고양이 4, 5마리만 경험하면 모든 고양이들을 알아보지만, 딥러닝은 수천만 번의 학습을 요구한다.

74. 컴퓨터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컴퓨터가 생기기 전에 이미 생겼습니다. 전쟁 중에는 대포를 쏘거나 포탄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계산을 해야 합니다. 계산 하나하나 자체는 간단해서 1,000여 명의 여자들이 큰 방에 자리 잡고 앉아 계산을 했습니다.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똑같은 계산을 적어도 다섯 팀이 나눠서 합니다. 이 계산에 동원된 사람들의 직업을 두고 컴퓨터라고 지칭했습니다. 이를 대체해주는 기계가 등장했고 그 기계에 자연스럽게 컴퓨터라는 이름이 붙게 됐습니다.

90. 뇌를 아무리 해부해봤자 영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자아도 없고, 감성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건 끝없이 많은 시냅스들입니다.

92~93. 인간의 뇌는 각 상황에서 저장할 가치가 있는 정보와 저장할 필요가 없는 정보를 구별하여 저장합니다. 그리고 그 구별한 정보들도 압축을 합니다. 아주 굵은 가지만 남겨두죠. 그리고 그 기억을 나중에 기억할 때에는 내기 예전부터 알았던 이야기, 내가 들은 이야기, 남들이 나한테 보여주는 이야기, 그런 것들을 합쳐서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기억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억한다’라는 것은 어디에다 정보를 저장했다가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매번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없죠.

111.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 기간을 ‘결정적 시기’라고 부릅니다. 그 기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오리는 태어나서 1~2시간, 고양이는 태어나서 4~8주, 원숭이는 태어나서 1년, 사람은 태어나서 10~12년이라고 알려져 있죠. 그 기간 동안은 뇌가 젖은 찰흙 같아서 자주 사용되는 실들은 살아남고 자주 사용되지 않는 길들은 뇌 안에서 싹 지워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아기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어를 듣고, 한국사람 얼굴을 보고, 한국 음식 냄새를 맡으면 거기에 관련된 신경세포들은 자꾸 자극을 받아서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만 필요한 악센트, 미국의 치즈 냄새, 핀란드의 언어 등은 한 번도 경험을 하지 못해서 그와 관련된 신경세포들은 결정적 시기에 다 죽어버리죠.

126. 더 이상 인간이 기계에게 세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관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주는 겁니다. … 기계는 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자체 인공신경망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합니다. 무엇을 학습할까요? 이 데이터에 포함된 통계학적인 정보에 대해 점점 더 압축된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학습이라고 말합니다.

136. 낸드플래시(nand flash)가 좋은 이유는 NAND(Not and And)라는 규칙을 가지고 나머지 논리규칙을 다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논리 규칙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일반적으로 NAND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A NAND B = NOT (A AND B). 논리 연산은 논리곱(AND), 논리합(OR), 부정(NOT)의 구성으로 표현 가능한데, NAND는 이 모든 논리 연산을 표현할 수 있다. AND, OR, NOT 역시 NAND로 표현할 수 있다. 이를테면, NOT A = A NAND A, A AND B = NOT ( A NAND B ) = ( A NAND B ) NAND ( A NAND B ), A OR B = ( NOT A ) NAND ( NOT B ) = ( A NAND A ) NAND ( B NAND B ).

139. 비트겐슈타인은 부정논리곱, 즉 낸드가 우주의 진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논리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낸드로 표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결론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155~156. 맨 아래층의 인공신경세포층은 픽셀 하나의 특징을 알아내고, 2층은 픽셀 네 개의 특징을 알아내고, 3층은 여덟 개의 특징을 알아냅니다. 밑에 있는 세포층들은 아주 디테일한 특징을 찾아내고 위로 갈수록 아주 거시적인 특징을 찾아내겠죠. 더구나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는 정보도 여기에 자동으로 입력됩니다. 자, 1층의 신경세포는 픽셀 하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 픽셀 하나가 시간에 따라 정보가 빨리 변합니다. 시야가 좁기 때문이죠. 위층의 신경세포들의 시야는 넓습니다. 시야가 넓으면 세상은 천천히 변해요. 아래로 가면 갈수록 시간이 빨리 변하고 위로 갈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171. 온라인에 있는 데이터와 문장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는 소프트웨어는 이미 상용화되어 있습니다. 워드스미스Wordsmith가 그 대표적인 소프트웨어죠. 워드스미스는 폭스, 블룸버그와 같은 언론사에서 2014년부터 기사를 써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워드스미스가 쓰는 기사는 비즈니스 뉴스가 대부분입니다. 문학이 아니고 주관이 들어가지도 않죠.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 관한 정보는 이미 다 온라인에 있으니 그 정보를 모아서 저장된 문법으로 표현합니다. 기사를 쓰는 거죠. 워드스미스는 지난 2014년 거의 2억 개의 기사를 썼다고 해요.

176~177.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본인의 전문성을 ‘직관’으로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워렌 버핏은 주식투자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투자를 잘하세요?’라고 물어보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10퍼센트의 언어로 대답을 할 겁니다. 책도 쓰지요. 워렌 버핏의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면 워렌 버핏같이 수익을 낼 수 있을까요? 절대 그 사람만큼 벌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 당연히 뇌는 무엇인가를 계산을 하고 그 일부만을 언어로 표현하는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걸 우리가 적분해서 합쳐서 직감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직감,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90퍼센트를 행동으로 표현한다면, 그 행동을 관찰해서 학습을 합니다.

181. 투자자들, 금융공학 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면 12개를 두고 수백 개의 변수들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을 살핍니다. 그러다가 ‘딱 지금이다!’하고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합니다. 어떻게 그 타이밍을 아냐고 물어봐도 ‘감’이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 ‘주식이 이때 올라가고 환율이 이만큼 내리면 이러저러해서 그때 투자를 한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분명 ‘감’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어떤 상호관계, 어떤 인과관계에서 선택을 하느냐 하고 물으면 설명을 해줄 테지만, 그 사람들이 설명한 것을 기반으로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들면 절대로 그 정도의 수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운’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은 알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거겠죠.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맵핑할 수 있다면, 마치 비디오게임처럼 맵핑한다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최고의 투자자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184.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동시통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 드디어 딥러닝을 사용해서 성공한 것 같습니다. 영어로 강연을 하면 목소리까지 흉내 내서 딥러닝 기계가 바로 중국어로 통역을 해줍니다.

240. 자동차가 스스로 운전할 수 있다면 어떻게 변할까요? 미국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니 상당수의 사람들이 무인자동차 시대가 온다면 굳이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을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자동차 스스로 다니는데 10시간이나 세워둔다는 것은 낭비라는 거죠. 20퍼센트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자동차를 소유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원할 때 저렴하고 깨끗한 이동수단만 사용하면 된다고 응답했죠. 무인자동차가 상용화된다면 아침에 차가 나를 데려다주고 다른 사람 데리러 가면 되겠죠. 이런 식으로 시뮬레이션해본 결과 현재 있는 자동차의 10퍼센트만 있으면 모든 사람을 운송할 수 있다고 합니다.

264. 무인자동차 시대에는 가로수길에서 저녁 먹고 싶다는 선호도가 비정량 데이터로 파악되면 유통업체들은 공짜로 가로수길에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시작할 거예요. 구글 같은 기업이 시작하겠죠. 택시비 3,000원을 구글이 대신 내줍니다. 편하게 식당에 가서 밥 먹고 5만 원을 지불하면 구글은 10퍼센트 중개료를 식당에서 받습니다. 구글은 택시비보다 더 많은 비용을 중개료로 챙기고 식당은 더 많은 손님을 모으고 고객 입장에서는 편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처음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는 다 돈을 내고 썼습니다. 포털사이트를 이용하는 데 돈을 지불해야 했죠. 그런데 지금은 스폰서가 가능하기 때문에 모두 무료예요. 무인자동차의 끝은 운송수단 요금의 무료화입니다. 모빌리티에 스폰서가 가능하다면, 지금 인터넷 사용을 스폰서와 데이터로 지불하는 것처럼 이동수단도 개인의 데이터와 스폰서를 통해 무료화될 수 있습니다.

269~270. 1990년 부활절 아침, 뉴욕 5번가의 사진 속 거의 모든 운송수단은 마차였습니다. 딱 한 대의 자동차가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말을 탔으니 아마 10년 후에도 마차가 주된 운송수단이고 자동차는 서너 대 늘 거라고 예상했을 거예요. 자동차는 가격도 비싸고 고장도 잘 나니까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13년 후 같은 날 같은 장소의 사진을 보면 모든 운송수단이 자동차입니다. 마차는 한 대도 없어요. 1908년 대량생산이 시작된 이후로 중산층이 차를 살 수 있었거든요.

282. 내가 준비 중인 특허와 비슷한 특허를 찾아주는 시스템은 이미 존재합니다. 변리사나 변호사의 역할은 비슷한 특허를 찾아서 내가 가진 기술을 새롭게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계가 언어를 이해합니다. 그래서 바로 존재하는 특허들을 수학적으로 가장 잘 피해갈 수 있는 새로운 재특허를 써주는 거죠.

290~292.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과거의 산업혁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19세기에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세 가지 혁신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첫째로는 프랑스에서 공교육이란 것을 시작했습니다. 왜 공교육을 도입했을까요? 국영수라는 학습과정을 만든 거잖아요. 왜 국영수를 만들었을까요? 1차 산업혁명 때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글을 못 읽었습니다. 대부분 농부였죠. 글을 못 읽는 농부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공장에서 일을 시키려니 적어도 글을 읽고 계산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 모든 국민에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입니다. 글을 가르쳐주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어쩌면 살아남은 거죠. 우리는 인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둘째로 독일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보험제도지요. 셋째로 영국에서 세금제도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나라의 모든 수입이 농업을 통한 것이었는데, 농업이 점점 사라지니까 기계에 대한 누진세 등을 만들어 산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돈을 벌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죠. 이 세 가지 제도로 19세기 1, 2차 산업혁명은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296~300. 2,000년 전 로마시대에서 지금하고 비슷한 경험을 한 번 했었습니다. 로마는 처음에 공화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산층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다 중산층이었죠. 중산층들은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산업은 농업이었습니다. 중산층 역시도 본래 직업은 농부죠. 그러다 보니 로마군대는 항상 봄에 출정해서 가을까지 돌아와야 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는 수확을 해야 했기 때문이죠. 여기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생겼습니다. 가까운 이탈리아에서 전쟁할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6개월 후에 돌아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우니까요. 그런데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합니다. 세력을 확장해야 했죠. 그래서 영국과 중동까지 전쟁의 범위를 넓힙니다. 그 당시 이동수단으로는 6개월 안에 영국에서 로마까지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면 5, 6년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대부분 중산층 남자들이 일을 못 하게 됐습니다. 5, 6년 동안 수입을 거둘 수 없었죠. 당시의 사회 구조상 여자들만으로는 가정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빚을 지기 시작했고 빚이 늘어나 땅을 팔아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 땅은 누구에게 팔았을까요? 세넥스에게 팔았습니다. 세넥스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나이의 돈 많은 노인들입니다. 세넥스가 땅을 사고 중산층은 계속 집도 팔고, 땅도 팔고, 동물도 팔다가 더 이상 팔 게 없으면 몸종이 됩니다. 5, 6년 만에 남자들이 돌아와 보니 땅도 없고, 집도 없고, 동물도 없고, 아내와 딸들은 몸종이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다 보니 수백만 명의 노예가 생겼습니다. 노예들이 앞으로의 인공지능 기계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의식주도 해결해주고 어렵고 힘든 일은 노예가 다 했죠. 로마제국을 상상할 때 세계도 정복하고, 노예가 수백만 명이나 되니 돈도 많고 편하게 잘살았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죠. 부는 적절히 분배되어야 모두가 잘살 수 있습니다. 노예들을 통해서 얻어낸 새로운 생산성과 부는 로마의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세넥스들이죠. 몇 천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중산층은 다 사라지고, 개인이 집 한 채씩은 가지고 있었던 예전의 로마에서 블록 전체가 한 사람의 소유가 됐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처럼 몸종처럼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살게 됐죠. 사실 로마 시민의 반 이상이 실질적 실업자였습니다. 사람들이 할 일이 없는 거예요. 험한 일은 노예들의 몫이고, 그렇다고 이전의 중산층들은 출세를 할 수도 없는 아주 위태로운 상황을 맞았습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먹고살 직업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폭동 혹은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조성되죠. 이때 사회적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어느 한순간부터 로마 시민들을 국가가 먹여 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소득을 시행했죠. 로마는 1년에 한 사람당 돼지고기 몇 킬로그램, 와인과 올리브유 몇 리터, 밀가루 몇 포대 등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기본적인 것들을 나눠줬습니다. 국가가 모든 사람을 먹여 살렸죠. 어차피 로마 사람들은 생산적으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노예들이 다 했으니까요. 국가가 삶을 보장해주니 잘살진 못하지만 굶어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이 많았죠. 그래서 로마는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습니다. 로마의 대부분의 유적은 엔터테인먼트 기반의 건축물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콜로세움이죠. 목욕탕도 있습니다. 다 무료였습니다. 콜로세움에서는 하루에 16시간 동안 잔인한 경기를 보여줍니다. 즉, 대부분의 중산층들이 스스로 생산적인 일을 해서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고, 그렇게 두면 폭동이 일어나니 먹고살게 해주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습니다. 결국 최악의 미래 시나리오는 인공지능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기본소득을 제공해 국민을 먹여 살리고, 24시간 케이블 TV가 자극적인 콘텐츠를 제공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겁니다.

304. 1차 산업혁명 때 도입된 부가가치세(Value Added Tax)처럼 부가지능세(Intelligence Added Tax) 같은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_ 김대식, <인간 VS 기계>, 동아시아, 2016.

: 8:44 pm: bluemosesErudition

Karl Friedrich Benz, Patent Motorwagen, 1886

September 10, 2019: 10:13 pm: bluemosesErudition

“나 또한 386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뜨거웠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30년 전 일이고, 386세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1990년대 이후 20년에 걸쳐 보상받았다. 젊은 세대 일부의 극우화 경향이 처음 관찰되던 몇 년 전, 나는 이것이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태도를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386세대의 자기절제 없이 젊은 세대의 우경화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장덕진)

“정의와 상식이 충돌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386’의 유통기한은 끝났다고 지적해왔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386의 기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도 뚜렷하다. 역사에 기여가 있다고 해서 권력과 정당성을 독점하는 것은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386에 대한 반감은 커져오고 있었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정당성은 이번에 탈탈 털어서 모두 써버렸고, 부채까지 생겼다. 그 정도 의혹이 불거졌으면 일단 사퇴하고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는 상식과 일단 장관이 되어서 의혹을 해소해가며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는 386 특유의 정의가 충돌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앞으로 한국 정치에서 386의 정의에 가산점을 줄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장덕진)

: 5:01 pm: bluemosesErudition

공기 저항 F = - kv

운동 속력 v = mg/k

: 10:45 am: bluemosesErudition

“금태섭 의원이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바로 조국 후보자였다.”

: 3:13 am: bluemosesErudition

20. 분명히 진화 개념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점은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이 지적했으며, 그 시점은 187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린스턴의 유명한 신학자인 찰스 핫지는 식물과 동물의 설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신이 그것들을 만들었다면, 설계의 문제에 관한 한 신이 그것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단번에 만들었는지 아니면 진화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20~21. 기독교적인 믿음과 상충하는 것은 바로 진화와 다윈주의가 유도되지 않았다unguided는 주장이다. (나는 여기서 ‘유도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계획되지 않았고 의도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23. 2차 세계 대전 후에 생물학의 대가로서 명성을 떨친 마이어Ernest Mayr에 따르면, “유전자 변이나 변종이 무작위적이라는 말은 새 유전자형의 생성과 주어진 환경에서 필요한 유기체의 적응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버Elliot Sober는 이 논점을 다음과 같이 좀 더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어느 변이가 이로울지를 감지하고서 그런 변이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물리적인 메커니즘은 (유기체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없다.” 요컨대 한 유기체에서 생기는 변이가 무작위적이기 위해서는 그 유기체나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중 어느 것도 적응을 위한 변이를 일으킬 메커니즘이나 과정, 또는 기관을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5.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묶여질 때에는 신의 설계를 부정하게 되지만, 진화론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연주의와 결합된 진화론적인 과학만이 신적 설계의 부정을 함축할 뿐이다.

27. 1859년 이전에는 “이토록 무수히 다양한 생명체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이 세상에 생겨났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번듯한 답변이 존재하지 않았다.

33~34. 내가 선호하는 답변은 “오, 복된 죄여! O Felix Culpa”라는 답변이다. “오 복된 죄여!”라는 개념은 신약성서 로마서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5:20)라는 구절에 근거해 있다. 기독교에서는 죄가 징벌의 대상으로서 부정적인 성격을 갖지만, 역설적이게도 선의 구원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되게끔 만드는 긍정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이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인간에게 죄가 없다면 구원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신이 베푸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죄가 복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복된 죄’라는 표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을 악의 문제에 적용시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데에 악의 존재를 끌어들이기 어렵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인간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악은 인간이 신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 복된 죄여!’에 근거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은 일종의 ‘필요악’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4.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준(準)종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45. 내가 전개하고자 하는 논증의 핵심적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N을 자연주의, E를 현대 진화론, R을 “우리의 인지 기능은 신뢰할 만하다”라는 명제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하자.
1) P(R/N&E)는, 즉 N과 E를 전제했을 때 R이 참이 될 확률은 낮다.
2) N&E를 받아들이고 전제 1)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R을 논파(반박)하는 근거defeater를 갖는다.
3) 이 논파 근거 자체가 논파될 수는 없다.
4) R에 대한 논파 근거를 갖는 사람은 N&E를 포함해서, 자신의 인지 기능에 의해 산출됐다고 볼 수 있는 모든 믿음에 대한 논파 근거를 갖는다.
5) 그러므로 N&E는 자기 논파적이며,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50~51. 이제 환원적 유물론(RM, Reductive Materialism)만 남았다. P(R/N&E&RM)의 값은 어떻게 될까? 이 이론에서는 어떠어떠한 (믿음) 내용을 가짐이라는 속성은 모종의 물리적인 속성, 아마도 신경적인 속성과 동일하다고 본다. 앞에서 예로 든 외계 생물체가 갖는 특정 믿음 B를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믿음 B를 갖는 것’을 적응된 것이되 그것이 갖는 다른 물리적 속성들뿐만 아니라 그 내용 덕택에 적응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시금 B와 관련된 내용의 진위 여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 내용의 진위 여부가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이유는, 환원적 유물론에서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는 위상을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즉 유물론자들은 믿음의 신경생리학적 속성만이 인과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과정에서 적응력을 인정받는 것은 믿음의 신경생리학적 속성뿐이다. 이것은 곧 심적 속성으로서의 믿음 내용은 진화 과정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화론이 자연주의 및 유물론과 결합되면 심적 속성으로서의 믿음 내용은 진화 과정에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의 인지 기능에서는 심적 속성인 믿음 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자연주의 및 유물론과 결합된 진화론은 우리의 인지 기능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자연주의와 결합된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지 기능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인지 기능이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자연주의적 진화론자들이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69~70. 베히의 저서가 도착했을 때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책은 진지한 과학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누락과 그릇된 설명으로 가득 찬 부정직한 선전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4월에 노트르담대학에 가서 베히의 주장들을 단호하면서도 공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다뤘고 그의 논변들이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반되는 증거와 논변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온갖 흔적들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노트르담대학의 그 모임에서 우리의 비판에 대해 쓸 만한 반격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헤이그와 나(데닛)는 우리의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 플랜팅거도 베히의 첫 번째 저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증을 서지 않았는데, 이제는 베히의 두 번째 저서에 대해 문외한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내가 지금 역정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86. 베히에 관해서는, 그의 노트르담대학 방문에 대한 내 기억이 데닛의 기억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하는 정도로 끝내겠다. 정말 매우 다르다. 내가 보기에 베히가 협잡꾼으로 판명되기는커녕 별다른 오류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는 데닛과 그의 동료에 대응해서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잘 고수했다고 생각된다.

98~99. 플랜팅거는 베히를 진지하게 고려해줘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평판 좋은 생물학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112.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주의Flying Spaghetti Monsterism는 창조론에 근거한 지적 설계론에 대한 패러디다. 지적 설계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보는 종교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12. 러셀의 중국 찻주전자China teapot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태양계에서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따라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있다고 어떤 사람이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의 이런 주장이 틀렸다고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생각을 터무니없다고 볼 것이다. 이것은 곧 증명의 부담은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것을 틀렸다고 입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국 찻주전자는 신의 존재에 관한 논쟁에서 무신론자들이 신을 가리키는 데에 즐겨 사용된다. 즉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신론자는 위에서 말한 중국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논리를 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반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틀렸다고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서 유신론자들이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때 러셀의 중국 찻주전자 이야기가 인용될 수 있다.

116. 한때 도킨스는 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개인적인 불신감에 의존해서 주장을 펼친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자기네가 좀처럼 진화론을 믿기가 어려우므로 진화론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데닛과 그의 동조자들은 유신론에 대해서도 같은 종류의 개인적 불신감에 근거한 반론을 펼친다. 자기네가 보기에 유신론은 믿을 수 없고, 공상적이고, 불합리하고, 조소와 냉소를 받아도 싸다는 등의 비난을 퍼붓는다. 이때 그들은 대체적으로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117.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은, 생태계의 경이로운 일들이 유도되지 않은 진화에 의해 생겨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믿으면서도 유신론자들의 인식적인 월권 혐의에 대해 독선적인 인식적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는 성매매 포주이면서도 이웃에 있는 극장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상영했다면서 분재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143~144. 베히처럼 플랜팅거에게도 (유전과 문화적 진화에 의해서) 좀처럼 진화할 수 없었을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무엇인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해보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자기가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불가능함을 입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베히처럼 플랜팅거도 깨닫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런 잠정적으로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특징들이 실제로 어떻게(언제, 왜) 진화했는지에 관한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_ 앨빈 플랜팅거ㆍ대니얼 C. 데닛, <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4.

: 2:42 am: bluemosesErudition

헤럴드를 떠나며(홍정욱)

: 12:09 am: bluemosesErudition

“현재 시집을 시리즈로 발간하는 네다섯 정도의 메이저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가면 하나 이상의 출판사에서 군말 없이 시집을 내줄 수 있는 시인은 300명 안팎이다. 등단 이후의 활동으로 편집자들과 독자들의 시선을 자주 끌었던 시인들이다. 두 번째 등단을 거쳤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