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2011

February 6, 2011: 3:23 am: bluemosesErudition

“연구자들은 백남준의 성취가 단순히 미학적 결과물이 아니라, 백남준의 실천과 사회공간이 조응하는 지점에서 철저하게 사회화되는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백남준의 미학적 성취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특정한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의 맥락 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 식민지 한국에서, 제국주의 일본을 거쳐, 독일과 뉴욕, 그리고 다시 80년대 후반 대한민국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백남준과 사회공간이 만들어낸 궤적은 반드시 백남준의 주관이나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결과를 초래했으며, 지금까지 백남준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업적들이 간과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_ 김동일, 선내규(2010). 백남준의 사회학, 음악장의 전복자에서 미술장의 지배자로

: 3:04 am: bluemosesErudition

서울대 한숭희 교수의 의문(왜 교육학은 경제학의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는가)을 서강대 김경만 교수가 해소(한국사회학의 도약을 위한 과학사회학적 모형)하였다고 생각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충분한 답변이었다. 보다 근원적으로 ‘지식’에 관한 탐구가 요청된다. 참고로, “소위 지식에서 도덕성이 탈각되기 시작한 현상이 18~19세기를 거치며 서양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환 중 하나라고들 한다. 동아시아인들은 (일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구의 지식을 깔보았으나 19세기에 크게 당한 이후 지식=유용성/힘이란 등식을 확립했다.”

1. Peter Burke(2000). A Social History of Knowledge: from Gutenberg to Diderot

2. Steven Shapin(1996). The Scientific Revolution

3. Peter Dear(2001). Revolutionizing the Sciences: European Knowledge and Its Ambitions, 1500~1700

4. Thomas Hankins(1985). Science and the Enlightenment

5. Michael Adas(1989). Machines as the Measure of Men: Science, Technology, and Ideologies of Western Dominance

February 5, 2011: 2:19 pm: bluemosesErudition

바늘귀에 매인 실처럼 번뇌가 좌측 편두통을 잡아 당긴다.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움직여 차 끓이고 밥 지으니 한결 개운하다.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February 3, 2011: 1:54 pm: bluemosesErudition

며칠째 악몽에 시달렸다. 엄격함이 편협함은 아닌지 반성케 된다. 나는 불완전한 완벽주의자다.

: 1:07 am: bluemosesErudition

기와 혈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다. 세속의 욕망에 젖은 이기적인 자가, 이타적인 삶을 표명하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민주노동당 이숙정(36)의 야만을 접하며 비통했다. 그 내면이 어떠한 폭압에 시달렸기에, 사소한 언사에도 자존감이 위태로워, 저토록 권위주의적인 만행을 억누르지 못했을까.

February 2, 2011: 8:48 am: bluemosesErudition

1. 분노의 억압에서 기인한 극심한 장염에 시달리고 있다. 새벽녘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주께 고백했다.

2. 임헌영이 편집한, 리영희의 <희망>이 출간됐다. 그는 편집인으로서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바로 자신의 서문 <한 인문주의자의 소망>을 수록한 것이다. 연도나 서명의 오기는 차치하더라도 ”진중권의 예리성” 운운하는 대목에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명백한, 무례다.

3. 리영희의 잡감문(雜感文)은 “자료수집이 거의 90%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니 그 고생은 보통이 아니었다. 매 순간마다 국제관계 전반에 대해서 날카롭게 살펴야 하고, 하찮은 것같이 보이는 어떤 힌트가 있어도 그것이 빙산의 일각으로 돌출한 그 수평 아래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의 덩어리를 찾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자료수집과 함께 상황판단의 다면적 시각도 비결의 하나라면 하나다. 다행히도 영어, 일어, 프랑스어, 중국어를 하는 덕택에 자료와 정보도 다방면일 수 있었다.”

4. 리영희가 [방대한] 자료에 근간해서 글을 쓰게 된 배경에는 노신(魯迅)의 영향이 크다.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 관계를 평이하게 풀어써야 한다. 추상적 용어를 덜 쓰고, 구체적 낱말로 표현해야 한다.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 증거와 자료를 풍부히 동원해서 제시해야 한다. 학자, 전문가, 교수, 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쳐준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원바탕이어야 한다. … 이것이 노신이었다.”

5. 1988년 <<월간중앙>> 12월호에 실린,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는 리영희 글쓰기의 한 전형이다. 여기서 그는 ‘자료’와 ‘노신’을 소개하며 민중에게 “일제 황국 군대의 충신으로서, 동족을 배반했던 일본의 괴리 ‘만주제국’의 만주군 소위에서 일본 육군 중위로 출세한 박정희가 가장 아끼고 귀여한 자” 전두환 패당의 심성적 논리를 기술하고, 대처방안을 제시한다.

February 1, 2011: 9:05 pm: bluemosesErudition

“모두스 포넨스라는 말로 집약되는 합리적 사유에서는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그것의 원인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원인을 알아내어 선후 관계의 연쇄를 만드는 것이다. 서양 합리주의에서는 이처럼 동일율과 모순율 그리고 ‘한번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핵심 요소로 가진다.”(강유원, 2004: 155~156)

* Modus Ponens(긍정의 식, modus = mode, ponere = to affi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