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의 억압에서 기인한 극심한 장염에 시달리고 있다. 새벽녘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주께 고백했다.
2. 임헌영이 편집한, 리영희의 <희망>이 출간됐다. 그는 편집인으로서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바로 자신의 서문 <한 인문주의자의 소망>을 수록한 것이다. 연도나 서명의 오기는 차치하더라도 ”진중권의 예리성” 운운하는 대목에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명백한, 무례다.
3. 리영희의 잡감문(雜感文)은 “자료수집이 거의 90%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니 그 고생은 보통이 아니었다. 매 순간마다 국제관계 전반에 대해서 날카롭게 살펴야 하고, 하찮은 것같이 보이는 어떤 힌트가 있어도 그것이 빙산의 일각으로 돌출한 그 수평 아래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의 덩어리를 찾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자료수집과 함께 상황판단의 다면적 시각도 비결의 하나라면 하나다. 다행히도 영어, 일어, 프랑스어, 중국어를 하는 덕택에 자료와 정보도 다방면일 수 있었다.”
4. 리영희가 [방대한] 자료에 근간해서 글을 쓰게 된 배경에는 노신(魯迅)의 영향이 크다.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 관계를 평이하게 풀어써야 한다. 추상적 용어를 덜 쓰고, 구체적 낱말로 표현해야 한다.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 증거와 자료를 풍부히 동원해서 제시해야 한다. 학자, 전문가, 교수, 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쳐준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원바탕이어야 한다. … 이것이 노신이었다.”
5. 1988년 <<월간중앙>> 12월호에 실린,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는 리영희 글쓰기의 한 전형이다. 여기서 그는 ‘자료’와 ‘노신’을 소개하며 민중에게 “일제 황국 군대의 충신으로서, 동족을 배반했던 일본의 괴리 ‘만주제국’의 만주군 소위에서 일본 육군 중위로 출세한 박정희가 가장 아끼고 귀여한 자” 전두환 패당의 심성적 논리를 기술하고, 대처방안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