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라고 하면 이거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야근수당 받게 해주겠습니다. 노동시간 줄여주겠습니다. 자식 보육과 부모님 봉양은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 신혼집은 국가가 빌려드립니다. 이래야 알아듣지 않을까.”
“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라고 하면 이거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야근수당 받게 해주겠습니다. 노동시간 줄여주겠습니다. 자식 보육과 부모님 봉양은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 신혼집은 국가가 빌려드립니다. 이래야 알아듣지 않을까.”
“이념이 욕망의 가면이라면, 윤리는 이념이란 가면을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욕망의 얼굴이다. … 기실 진보좌파 진영에서 개탄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은 계급이라는 범주에 국한하여 보상 차원에서 대중의 행위를 재단하는 경제주의적 비판이다. 도저한 경제이성적 관점에 입각하여 대중의 행위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좌파 엘리트의 입론은 주류 경제학의 시장주의적 견해와 다를 바 없다. 현실과 괴리된 가정을 기준으로 사태를 해명하고자 시도하면서, 대중의 행위를 납득할 수 없다고 분개하며 훈계하는 것은 일종의 난센스이다. 인지 부조화 이론이 역설하듯, 대중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위선의 합리화는 욕망의 정당한 표출을 위한 사회적 방어기제이며, 그것이 당대 사회의 전면적 요구일 때 윤리의 외연을 넓혀 이전 시대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가치를 아무러 갈등 없이 수용한다. … 대중은 약자이지만 강자의 이데올로기를 좇으며 동류의 계급을 변호하지 않는다. 내신성적이 30등인 학생에게 비슷한 서열의 무리는 부정하고 싶은 또래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민주주의 하에서 대중은 약자로서 사회적 차별에 신음하지만 강자로서 자신에게 이로운 차별은 옹호하기에, 궁극적으로는 차별의 기준을 수용하며 위계의 상승에 전념하게 된다.”(HE, 2010: 94~96)
* 홍은택의 「블루 아메리카나를 찾아서」가 뇌리에 맴도는, 19대 총선이었다(2012.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