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ugust 1st, 2012

August 1, 2012: 11:24 am: bluemosesErudition

“군부를 중심으로 한 선군파와 당과 내각을 중심으로 한 ‘민생경제파’는 2000년대 이래 북한 경제의 양대 산맥이었다. 민생경제파가 북한의 한정된 자원을 인민생활 개선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려는 데 비해, 선군파는 핵과 미사일 개발 등 군수경제 및 군부 기득권의 수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대립의 역사야말로 북한 경제 난맥상의 원인이라 할 것이다. 2002년 7·1 조치를 통해 박봉주를 필두로 한 민생경제파가 잠깐 주도권을 잡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과 군으로 배급되던 석탄을 그보다 절박한 민생경제 부분으로 돌리려던 박봉주가 2007년 실각하면서 최근까지는 선군파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 11:07 am: bluemosesErudition

“1962년 4월의 어느 새벽. 서울 청운동 송혜영씨 집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그 사내들은 송씨를 비행기에 태워 부산으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부산 중앙정보부(중정) 사무실. 중정은 송씨가 외국에서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를 밀수했다고 몰아세웠다. 세관에서 허락을 받은 물품이었다. 담당 세관원도 불려왔다. 밀수가 아니라고 말하자, 세관원은 며칠 후 해고됐다. 송씨는 일본에서 치료받는 남편을 불러오기 위한 인질이었다. 남편 김지태씨(당시 부산일보 사장 겸 부일장학회 이사장)가 바로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중정에 끌려간 김씨는 군 검찰에 의해 구속됐다. 관세법 위반, 부정축재 혐의 등 9개 혐의가 덧씌워져 김씨는 1962년 5월24일 7년 징역형을 구형받는다. 1962년 6월20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내 법무관실. 김씨는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 앞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낸 고원증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고 변호사는 미리 작성해둔 서류를 꺼냈다.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의 주식 100%, 부산 서면 일대의 금싸라기 땅 10만 평, 그리고 부일장학회의 경영권을 국가에 무상 기부하겠다는 기부 승낙서였다. 김지태씨는 여기에 도장을 찍는다. 김씨의 아들 김영구씨는 ‘내가 인감도장을 들고 가자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채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라고 증언했다. … 부일장학회는 이렇게 사라지고 만다. 김씨는 재산을 국가에 강제로 헌납했는데, 헌납받은 곳이 5·16장학회로 되어 있었다. …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2년 1월14일 5·16장학회는 박정희의 정(正)자와 육영수의 수(修)자를 따서 정수장학회로 간판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