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3rd, 2014

February 3, 2014: 6:48 am: bluemosesErudition

“True faith dose not ignore logic, but eventually rises above logic. Do we have anything among our thoughts that must rise above logic through faith in Jesus? … Do you believe that thanksgiving brings miracles?”

: 6:34 am: bluemosesErudition

교육사회학, 종교사회학

: 6:23 am: bluemosesErudition

“사람들은 훈련, 사랑,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성장함에 따라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이해도 성장하게 된다. 반대로 삶들이 훈련과 사랑과 생활의 경험을 통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해심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인생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이해의 폭과 그 세련됨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다양한 편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가 곧 우리의 종교이다. 비록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이해(세계관)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널리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중략) 현실적인 종교나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다시 말해서 최대한 현실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역할에 부합되는 종교과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해의 범위를 확대시켜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지도 만들기와 전이의 문제이다. (중략) 우리는 서로 다른 작은 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러한 모든 전쟁이 성전(聖戰)이 되고 마는 것이다.”(M. Scott Peck, 1978[2002]: 268, 277-279)

* 스마트Ninian Smart의 종교와 세계관Worldviews을 적절한 시기에 책장에서 발견했다. 윤리 개혁은 세계관 전쟁을 경유하나 그 이상이어야 한다. 민속지학ethnography의 한계를 비판하는 담론의 한계를 지양해야 한다.

: 6:08 am: bluemosesErudition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로마와 헬라인의 사유 구조에서 본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당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복음을 당대의 지성적인 틀에 맞추어 그 거칠고 투박한 면을 세련되게 만들어 넓은 길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복음의 미련함을 멸시하는 자들의 시각을 틀로 삼아, 뉴비긴이 즐겨 사용하는 피터 버거Peter Berger의 용어로 하자면 ‘타당성 구조’로 기독교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읍소하는 전략은 복음의 본질과 신앙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분의 십자가를 프리즘으로 삼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의 경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제약에 갇힐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해석하겠다고 달려들고, 또 그런 식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는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뉴비긴은 각 시대의 지배 질서와 타당성 구조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뉴비긴을 읽어야 할 두 번째 이유다.”(김기현)

*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ryre와 폴라니Michael Polanyi에 의존하여 당대의 타당성 구조Plausiblility Structures에 균열을 가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에 ‘진리’를 하나의 선택지로 고려할 것을 변증한다. 이 방식에 유념해야 한다.

: 5:49 am: bluemosesErudition

“로이드 존스를 읽으며 회심하였고 아브라함 J. 헤셀을 읽으며 인생을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C. S. 루이스와 프레드릭 뷰크너를 읽으며 깊은 안식을 경험하였다.”(김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