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공의와 정의, 하나됨, 자기부인
“For I have chosen him, that he may command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righteousness and justice, so that the Lord may bring to Abraham what he has promised him.”(Genesis 18:19)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땅 주려고, 자손 주려고”가 아닙니다. 창세기 18:19에서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고 널 선택했다”라고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할 공간이 필요해서 땅의 약속이 의미가 있고, 정의와 공의를 행할 사람이 필요해서 자손의 약속도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본말이 전도되어 “땅과 자손”만 강조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교회만 여기저기 세우는 것만 사명으로 여기고, 그 교회에 사람을 채우는 것만 사명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정의와 공의는 생소해서는 안 되는 주제, 우리 삶의 핵심이 되어야 할 성경의 주제입니다. 공의의 기본 의미는 “올바른 관계”입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겁니다. 옳은 말을 한다고 공의로운 게 아니에요. “올바른 관계” 속의 “올바른 말”이어야 하죠. 슬픈 사람한테 정답을 말하는 건 공의가 아닙니다. 슬픔에 공감하는 말을 할 때, 그래서 슬픔에 잠겼던 그 사람이 “당신 말이 참 옳다!”고 할 때, 그게 바로 “공의롭다!”는 선언이 되는 겁니다. 정의의 기본 의미는 “재판”입니다. 억울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무조건 참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일이 불가피함을 아셨어요. 그래서 공동체 안에 해결 통로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입니다. … 정리하자면 슬프고 억울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슬픔에 다같이 공감하며 울어주면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고, 그 억울함을 밝히 드러내어 제대로 다루고 풀어내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거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간”과 “사람”을 주신 겁니다. 이 목적을 상실한 채 이스라엘이 땅의 특별함과 선민의식만 고집했을 때, 하나님은 다 부숴버리셨어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그래서 망한 겁니다.
_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 연구위원 + 일산은혜교회 협동목사
Now, behold, Saul was coming from the field behind the oxen. And Saul said, “What is wrong with the people, that they are weeping?” So they told him the news of the men of Jabesh. And the Spirit of God rushed upon Saul when he heard these words, and his anger was greatly kindled. He took a yoke of oxen and cut them in pieces and sent them throughout all the territory of Israel by the hand of the messengers, saying, “Whoever does not come out after Saul and Samuel, so shall it be done to his oxen!” Then the dread of the Lord fell upon the people, and they came out as one man. When he mustered them at Bezek, the people of Israel were three hundred thousand, and the men of Judah thirty thousand.(1 Samuel 11:5-8)
“The saying is trustworthy and deserving of full acceptance, that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 of whom I am the foremost.”(1 Timothy 1:15)
One must observe the proper rites…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오후 네 시에 네가 온다면 세 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난 더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되면 이미 나는 불안해지고 안절부절 못하게 될 거야. 난 행복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난 알 수 없을 거야. … 의례가 필요해.”
“의례가 뭐야?”
“그것은 너무 잊혀져 가는 것이지.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이를테면 나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에게도 의례가 있지. 그들은 목요일이면 마을 처녀들하고 춤을 춘단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목요일이 아주 신나는 날이지! 나는 포도밭까지 산책을 나가지. 만일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춘다면 날마다 같은 날들일 거야. 그러면 내겐 휴일이 없게 될 거고.”
* Le Petit Prince, 1943, #21/27.
“1980년대 중반,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일본의 어느 활동가가 나에게 책 한 권을 권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공동환상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책이었다. 1968년 출간돼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책이다. 요시모토는 이 책에서 국가란 사회계약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말하는 부르주아지 계급을 위한 폭력장치도 아니며, 오직 공동의 관념이 만들어낸 창작이며 픽션이라는 내용을 펼친다. … 일본인 친구가 이 책을 왜 나에게 권했는지 그 속마음을 알 길은 없다. 짐작건대 <공동환상론>이 교조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서로, 스탈린주의와 일본 공산당에 반대하는 1960년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학생 및 신좌익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이유일 것이다. 그는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읽고 있던 나를 교조주의자라 ‘착각’하고 이 책을 읽고 교조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호의 아닌 호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교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친절이 실패로 끝난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가 권한 책이 너무나 난해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본어 실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이나 읽기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도중에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문헌을 보니 이 책의 완독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한다니 온전히 내 지력 탓만은 아니다. 그때부터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나에게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권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