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갑절
A Brief Memoir of Urban Design
“1966년 남서울, 그러니까 지금의 강남을 개발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북이 인구나 토지나 모두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휘 아래 그해 1월 중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됐다. 2년 뒤엔 이 다리와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가 공사에 들어갔다. 이 두 사업이 강남 개발의 출발점이었다. 땅값이 폭등한 계기이기도 했다. 고 박 전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 한강 아래에 고속도로를 만들 생각은 그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못했을 것이다. 1970년만 해도 자동차 수가 2만 대도 채 안 됐다. 단 한 대도 등록이 안 된 동네가 수두룩했다. 이런 상황에 고속도로를 만들 생각을 누가 했겠나?”
1966년, “한남대교 착공 당시 신사동 땅값은 3.3㎡(평)당 200원 정도였다. 당시 강북의 대표적인 고급 주택가는 신당동이었는데 거긴 3.3㎡(평)당 가격이 3만원이었다.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각각 400원쯤 했고. 이때가 짜장면 한 그릇에 40원 하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짜장면 열 그릇이면 압구정동에 땅 한 평을 살 수 있었던 거다. 착공 후 1년이 지나자 압구정동이 3.3㎡(평)당 3000원으로 뛰더라. 말죽거리(양재) 일대는 약 4000~5000원에 거래됐다. 압구정동은 홍수 때마다 침수되는 지역이라 그때만 해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양재동이 그래서 더 비쌌다. 압구정동 땅값은 2000원~3000원대로 양재동의 절반 가격이었는데도 아무도 안 샀다. 강남 개발이 거의 마무리된 1979년 신당동은 3.3㎡(평)당 50만원, 압구정동은 35만원, 신사동은 40만원 하더라. 그러다 1980년 들어 강남 땅값이 역전했다. 15년간 강북 땅값이 15배 뛰었는데 강남은 2000배 뛴 거다.”
“다들 강남에 안 오려고 해서 고생했다. 오죽했으면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 했겠나. 강남을 개발해 사람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1972년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이 학군 이동 아이디어를 냈다.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개 공립고와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5대 사립고가 당시 명문이다. 여학교로는 경기·이화·숙명·창덕·진명·정신을 알아줬고. 모두 종로구나 중구에 있었다. 이 학교들을 모두 강남으로 이전시키는 구상이었다. 그러면 인구가 이동하며 강남 개발이 빨라질 것으로 보았다. 여론 주도층이 모두 동문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지배층의 추억과 향수가 배어있지 않나. 그들의 부인도 다들 그곳 출신이었다. 한국의 동문과 재학생은 물론 재외동문까지 나서서 반대했다. 엄청난 파워였다.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는데 결국 화동의 교사(校舍)는 허물지 않고 말끔하게 개수해 도서관으로 쓰고 교정도 단장해 도서관 뜰로 남긴다는 확약을 해주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했다. 당시 경기고 땅은 1만1000평이었는데 이걸 3만2250평으로 보상해주고 새 건물을 지어준다는 조건도 추가했다. 아마 유신시절 중앙 정부의 유일한 패배였을 거다.”
“2호선이 생기면서 강남의 대중교통망이 연결됐다. 2호선 탄생 과정을 보면 지금 생각해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다. 당시 구자춘 시장이 어느 날 각 국·과장을 모아 놓고는 갑자기 2호선 착공을 지시했다. 서울시 지도를 펼쳐 놓더니 서울시청에서 시작해서 큰 타원형의 지하철 노선을 그리더라. ‘영등포도 들어가야겠지, 여기도 들어가야지’ 하면서 굉장히 즉흥적이었다. 군 출신이라 그런지 추진력이 있었다. 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나는 그때 반대했다. 순환선은 시기상 이르다고 생각했다. 2호선이 강남 고속터미널을 안 지나가지 않나. 너무 빨리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거다. 그걸 3호선이 뒤집어 썼다. 압구정동에서 바로 양재 쪽으로 빠지는 직선 코스를 놔두고 엉뚱하게 신사·잠원·반포를 거쳐 가는 곡선형이 됐다.”
“난 평소에도 강직한 성격이다. 게다가 공무원 신분으로 터득한 정보를 이용해 돈을 버는 건 부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추후라도 들켰다면 아마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물론 돈 가방을 싸 들고 와서 정보를 알려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땅을 사지도 정보를 돈 받고 팔지도 않았다. 돈벼락 맞으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강남의 대표적 땅부자들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김형목은 자식 문제로 속을 썩였고, 조봉구도 삼호가 파산한 뒤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하더라. 인생이 그런 거다.”
_ 손정목, 월간중앙 인터뷰(2016. 2. 17.) 후 별세(2016. 5. 9.)